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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전문학회 고전문학연구 고전문학연구 제52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235 - 260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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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和記略』은 1882년 박영효가 特命全權大臣兼修信使의 직함으로 일본에 사행하면서 기록한 일기형식의 외교 기록이다. 본고에서는 박영효의 파견 배경과 사행 중 외교활동을 살펴보고, 이러한 그의 사행 활동이 『사화기략』 속에 어떻게 투영되어 기록되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일반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사화기략』이 해행총재 시리즈로 국역되면서 가장 널리 알려져 왔지만, 본고에서는 부산대본의 의미도 제시하였다. 박영효 사행의 배경을 살펴보면, 임오군란 후속 조치로써 체결한 제물포조약의 비준문서를 교환하고 양국의 우호를 새롭게 하자는 명분도 있었지만, 당시 조선 조정이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던 상황이었기에 일본과 서양에서 차관을 도입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또한 고종은 군란으로 친청 세력이 득세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 개화파 관료들을 수신사로 발탁하였다. 박영효는 차관 문제 해결뿐 아니라 조약체결을 위해 서양의 각국 외교관들과 활발히 교섭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활동은 조약 체결로 조선의 독립이 인정되고 근대국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조선이 청의 종속국이 아니며 자주 독립한 나라임을 천명하려 하였다. 『사화기략』을 보면, 이러한 그의 독립에 대한 지향이 단순히 정권 획득을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식적 차원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연호 대신 조선 開國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근대적 24시간 시스템에도 적응하고 있었다. 또한 國旗를 외교의 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독립 국가 조선을 드러내고자 하였으며, 여러 공사들 앞에서의 祝辭를 ‘자국어’로 하는 상황을 아직 정제되지 않았던 국한문혼용체로 남겼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의 그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은 국내의 정치 상황과 근대 독립국가에 대한 그의 확고한 인식이 맞물려 이루어졌으며 『사화기략』은 그것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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