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59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71 - 88 (1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논문은 20세기 전반기 일제가 남한산성에서 저지른 파괴와 탄압, 그리고 주민들의 저항사례를 시론적으로 고찰한 글이다. 일제는 1896년 경기도 이천에서 일어난 남한산성연합의병을 강제 진압한 이후, 1907년 8 월 중기의병들이 재봉기하자 또다시 이 곳이 경기의병들의 집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적극 파괴하고자 하였다. 남한산성 파괴는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군 정예부대가 맡았는데, 이 부대는 1907년 8월 22일 기병대를광주 남한산성에 파견하여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는 화약고와 무기고를 폭파하였다. 이로 인해 700년 된 고찰인 望月寺를 비롯해 8개의 사찰이 소각되었다. 또한 일제는 1917년 광주군청을 경안리로 이전하여 300년간행정중심 역할을 한 산성마을을 퇴락시키도록 유도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남한산성 지역주민들의 열띤 지원과 학생들의 향학열이 높았던 사립학교를 탄압하였다. 1900년 廣州小學校에서 출발한 산성마을의 근대 학교는 1906년 사립 廣興學校로 재건립되었는데, 이 학교는지역주민들의 뜨거운 지원과 향학열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1911년과 1918년 두 번에 걸쳐 학교의 이름을 바꿔버리고 식민화 교육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일제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산성마을 주민들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계몽활동을전개하였다. 일부 산성마을 주민들은 1927년 전 민족적 연합운동단체인 신간회의 광주지회를 설립하는데 적극참여하는 한편,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신간회 광주지회의 창립에 앞장선 이 마을 출신 石惠 煥은 문맹퇴치와 소비조합 설립 등에 적극 나섰으며, 타 지역 노동운동도 적극 지원하였다. 하지만 1931년 5 월 신간회가 해소되자, 석혜환과 마을 주민들은 비합법적 사회주의운동을 꾀하였다. 1936년 1월 일제에 의해적발된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은 남한산성 마을에서 형성된 항일의 정서가 지역 계몽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며, 이 경험이 사회주의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여 타 지역으로 확산된 항일 저항운동의 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31)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