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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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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60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03 - 122 (2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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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구한말부터 1920년대까지를 중심으로 장도빈의 활동과 현실인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구한말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이자, 신민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救國’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교육·언론·국사연구 활동을 시작하였다. 장도빈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던 중 1912년 1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신채호를 만나 함께 생활하였으며 권업신문 의 논설주필도 잠시 맡았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르면서 비참한 한국인의현실을 목격하였으며 그 원인을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활했던 2년여 간은 장도빈의 현실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국내로 돌아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섰다. 1920년대 조선에서는 ‘신문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세계개조의 흐름에 따라 문화주의를 받아들여 사회 및 구례의 관습적 행위들을 개조할 것을 주장하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장도빈은 한성도서주식회사의 설립을 인가받았으며 서울 · 조선지광 등 출판사와 각종 잡지를 창간하여 교육 및 계몽활동에 전념하였다. 국사연구자로서도 여러 권의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민족의 미래로청년을 주목하고 이들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1920년대 장도빈은 민족주의계열에서 벗어나 문화주의 계열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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