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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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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27호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93 - 132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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布告天下文(이하, 포고문)은 1896년 2월 7일 재야 유림인 郭鍾錫이 姜龜相, 尹冑夏, 李承熙, 張完相, 李斗勳과 함께 서울에 있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의 공사관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발송한 서한이었다. 본 논문은 당시 곽종석이 지역 유림의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유교적 세계관인 華夷論에서 夷狄으로 이해되던 구미열강에 도움을 호소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곽종석의 문집인 『俛宇集』에 수록된 1895~1896년 편지들을 분석했다. 『면우집』에는 편지가 다량 수록되어 있어 곽종석의 사상과 행적을 파악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1895~1896년의 편지는 대개 곽종석이 1895년 12월 안동의병에 불참하게 된 배경과 1896년 2월 구미열강의 공사관에 도움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곽종석이 포고문을 발송한 경위를 일제의 국권 침탈을 강력히 규탄함과 동시에 아관파천 이후 고종집권세력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유교문화를 수호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표명하는 데에서 찾고자 했다. 포고문 발송은 고종집권세력과 정치적 공감대를 확인하고 아관파천 이후 조성된 정국에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진행한 행위라는 점에서 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곽종석의 포고문 발송에는 사상적인 목적도 개재되어 있었다. 즉 포고문은 유림 지도자로서 1894, 1895년 두 차례의 ‘개혁’을 통해 유교문화가 급격히 쇠퇴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유교문화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소명의식을 반영하였다. 본 논문은 곽종석이 1895~1896년 의병운동 제의를 거절하면서도 구미열강의 공사관에 포고문을 발송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었던 정치적, 유교적 배경을 이해하고, 곽종석이 1919년의 巴里長書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리라 판단된다. 1896년의 포고문과 1919년의 파리장서에는 20여 년의 시간적 간극과 사상적 차이가 있었지만, 유림의 지도자로서 유교문명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 유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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