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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56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 - 3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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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산리는 진주목 東面 勝禦山里에 속한 네 개의 자연 마을 가운데 상승어산과 하승어산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후에 이웃 龍奉里에 합해졌다. 승산리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관련된 길은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승산리는 남해안 고성지역에서 내륙의 의령·삼가지역을 연결하는 지름길에 위치하였다. 승산리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474년 무렵이며, 처음으로 들어선 곳은 蓮塘 許東岦(1601-1662)의 유허지 연당의 북쪽 일원이었다. 승산리 김해 허씨의 입향조는 許錘인데, 1474년 허추는 진주 班東山里 진양 강씨 姜叔卿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산리로 이거하였다. 이로써 승산리에 사족이 거주하게 되었다. 허추는 비록 학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수된 벼슬도 참봉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육신으로서 명망이 높은 함안 원북리 漁溪 趙旅의 가문과 情分을 깊이 맺고서 교유하였던 인물이다. 승산리는 15세기 말기에 사족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17세기 중엽까지도 多數의 사족이 거주하는 마을로 성장하지 못했다. 승산리가 사족 마을로서 성장하는 데에 첫 디딤돌을 놓았던 이가 입향조 허추라면 그 정치·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한 인물이 觀瀾 許國柱이다. 관란 허국주는 비록 벼슬이나 학문으로 현달하지 않았지만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승산리 김해 허씨 가문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조선 중기 승산리는 사족 마을로서 성장의 한계를 지녔으나 17세기 중엽 이후 승산리 김해 허씨는 벼슬로 현달한 자가 배출되는 등 사족 마을로서 성장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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