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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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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33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51 - 18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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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589년에 일어났던 ‘기축옥사’ 희생자의 가해자에 대한 공방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당쟁과 기록의 상관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많은 희생자가 나온 ’기축옥사’에서 가장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는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었다. 사건 이후, 여론은 이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정철과 유성룡 두 사람을 지목하여 공방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사건의 실상이 기록물로 만들어지고 또 유통되었다. 17세기 초반에는 대체로 유성룡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서인들이 많은 기록을 남겼다. 18세기에 나온 여러 당론서의 경우, 남인과 소론계가 작성한 글에서는 정철 때문에 이들이 희생되었다고 강조했고, 노론계 당론서에서는 유성룡을 가해자로 서술했다. 각 당파에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기록, 증언, 소문 등-를 최대한 확보하여 이를 사실(事實)로서 굳히고자 했고, 불리한 상황은 애써 무시하거나 배척했다. 이발 모자의 죽음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 하는 질문 혹은 그를 둘러싼 논쟁에서 어떤 기록이 믿을 만하다고는 현재 확언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당대의 여러 기록에 제시된 내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이 되어 조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적어도 그 세계 속에서 한 개인의 기록, 당론서의 기록은 변하지 않는 절대의 현실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당쟁 시기의 특정 기록에 대해, 오늘날 ‘참’과 ‘가짜’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다. 오히려 여러 기록 상호간의 관계, 그리고 하나의 기록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정치 사회적 맥락을 두루 살피며 그 기록이 지닌 역사적-정치적 위치를 상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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