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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한문교육학회 漢文敎育論集 漢文敎育硏究 제31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431 - 467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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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秉哲(1817~1863)은 경화세족 출신의 고관이면서 동시에 정약용, 박규수, 최한기와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천문과 역산 분야에 독보적인 식견을 탁월한 과학 저술을 남겼고, 종래의 화이론적 세계관에 속박되지 않는 지평에서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남병철은 문과에 급제한 이후 26세 때까지 외가의 별서 玉壺精舍에서 열린 白蓮社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열정적으로 시를 지었다. 이러한 시사 활동을 통해 그는 당색·계층·적서·장유의 경계에 구애되지 않고 당대의 명사들과 광범하게 교유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외조부 김조순 대부터 이어져 온 경화세족의 문화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 남병철은 “경세제민과 무관한 글은 지을 것이 못된다”라는 顧炎武의 견해에 공감하여, 시 창작을 폐하고 士로서의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데, 그 전환의 시점은 1842년 여름 무렵으로 추정된다. 남병철의 회인시는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에 창작된 것으로 공경, 사대부로부터 서얼, 중인층 등 다양한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어 시로 쓴 당대 명사의 인물지라는 성격을 지녔다. 특히 김정희파의 속하는 중인층과 정약용가의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특색이었다. 남병철은 회인시에서 대상 인물과 맺은 감회를 표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명사들의 빼어난 점을 품평하는 ‘論詩’의 방식을 취하였다. 남병철은 긍정적이며 여유로운 태도로 명사들의 인격미를 淡雅하게 그려냈는바, 그 결과 서얼층과 중인층의 경우 불우한 측면이 약화되고 명사로의 풍모가 주로 부각되었다. 남병철은 청조 학예에서 계발 받은 학식을 기반으로, 그 정곡에 해당하는 비유를 찾아내어 인물을 품평한 결과, 19세기 조선 명사의 인격미를 고양시키고 한층 넓은 지평에서 해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즉 학적 지식에 기반한 인물 품평이었다. 이 점 19세기의 다른 회인시에 견주어 남병철 시가 지닌 중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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