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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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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한문교육학회 漢文敎育論集 漢文敎育硏究 제35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215 - 243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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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장예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임진왜란을 통해 명대 인장 문화가 조선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등장하면서 조선의 인장문화는 크게 발전하였다. 이들은 각기 조선 인장문화의 두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특히 김상헌은 「군옥소기(群玉所記)」를 지어 인장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김상헌은 여기서 각법(刻法)보다는 인장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는 상고(尙古) 정신의 발현이었다. 김상헌에게 있어 인장은 단순한 완상(玩賞)의 물건이 아니었다. 인장은 고인(古人)을 만나는 곳이자, 고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형상화하는 수단이었다. 이를 통해 유가(儒家)들이 꺼렸던 완물상지(玩物喪志)란 언사(言辭)를 무력화시켰다. 인장에 대한 김상헌의 이러한 해석을 통해 조선의 문인들은 인장문화를 깊이 수용하게 되었다. 허목 역시 미수전(眉叟篆)이라는 독특한 전서를 인장에 사용함으로써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문자학적인 측면보다는 서법(書法)을 통한 상고(上古) 문화의 회복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허목의 이 업적은 후학들에게 의해 계속 이어졌고, 이들이 연구한 고문(古文)들이 인장(印章)에 사용되면서 조선 인장의 큰 줄기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특히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그들의 글씨는 물론 인장에 미수전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임란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문인들의 인장에 대한 인식의 초점은 교육적 의미와 함께 상고 정신의 회복을 꾀한 것이다. 또한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비판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 틀은 김상헌과 허목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처럼 인장(印章)을 상고(尙古)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해한 것은 조선시대 인장문화의 큰 특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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