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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4권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 - 19 (1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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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기공비는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동천왕 20년 秋8月條(246년-신라 조분왕 17년․백제 고이왕 13․魏 齊王 7년)에 기록된 魏將 관구검의 침공과 관련된 유물이다. 질 좋은 철의 산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은 고구려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태조왕 이래로 꾸준히 추진되던 고구려의 요동경략은 후한 이후의 혼란을 틈타 요동을 근거지로 삼은 공손씨에 의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공손씨의 존재가 自國의 이익에 큰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 고구려는 동천왕 8년(234) 위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온 것을 계기로 위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고구려는 요동공략에 장애가 되는 공손씨를 견제하고 결국은 제거하기 위하여 위와 오, 양국과 동시에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위가 더 필요했으므로 魏와의 외교에 중점을 두게 된 것이다. 공손씨가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게 되자 당시 중국대륙의 ‘삼국시대’라는 복잡한 상황과 맞물려 점차 요동은 중국영향권에서 이탈해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공손씨가 위와 오 사이에서 그 대립을 이용하여 외교전을 펼치게 되자 오, 촉과 대결상태였던 위는 후방인 요동 공손씨 정권에 대해 유화책을 취하였고 공손씨도 위나라쪽으로 기울게 되었으나 위의 정책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공손씨를 그대로 두고서는 요동이 안정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당장 국익에 손해가 된다는 점에 있어서 고구려는 삼국 중 魏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이다. 이후 魏가 공손연을 공격하여 요동에 三代 50여 년 동안 자리잡고 배후에서 위를 위협해온 공손씨 문제를 마무리지을 때 고구려는 군사를 보내 돕기까지 하였다. 동천왕이 위와 우호관계를 맺고 원군까지 보냈던 것은 복잡한 상황을 극복하고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기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게도 요동은 배후안정과 삼국전쟁에서 우위를 점하여 전쟁에 전념하기위해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결국 고구려와 위의 연대역시 일시적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는 요동의 지리와 사정에 익숙한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관구검의 고구려 공격은 단순히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배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장악하려는 魏의 대외정책 중 하나였다. 그것이 요동을 공략하면서 적극적 대외정책을 펼쳐나가던 고구려와 충돌하게 된 것이다. 위의 침공이 고구려에게 준 충격은 컸으나 곧 중원에서 魏․晋의 왕조교체가 일어나고 위의 뒤를 이은 진도 오래가지 못한 채 환란에 휘말리면서 중국세력은 요동과 한반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러한 대외적 여건도 고구려가 빠른 시간 내에 국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후에도 고구려는 끊임없이 요동을 공략하였고 미천왕이후. 고국원왕시기의 시련을 딛고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관구검의 침공은 배후를 튼튼히 하여 삼국 간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고 중국중심의 세계질서를 되찾고자 하는 위의 대외정책과 전략적 요충지였던 요동을 차지하여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고구려의 대외정책, 양국 간 대외정책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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