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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0권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125 - 173 (4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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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唐 長安 4년(704) 彌陀山에 의해 번역되었다. 이시기 당에서는 서역을 유학하고 온 승려들에 의해 인도에서 행해진 法舍利信仰이 체계화되었다. 또한 밀교승려들의 활동으로 많은 밀교경전들이 번역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탑 속에 법사리를 봉안함으로 인해 공덕이 생긴다는 내용의 造塔經들이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무구정경』은 여러 조탑경 가운데 풍부한 공덕의 내용을 담고 있어 신라에서 수용될 수 있었다. 총 여섯 개의 다라니로 구성된 『무구정경』은 그 序分에서 바라문을 極樂으로 이끄는 방편으로써 造塔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극락은 아미타정토를 지칭하는 말이다. 신라 중대 왕실에서는 내세적인 성격을 띤 아미타신앙이 유행하였고, 중대의 화엄사상은 아미타신앙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무구정탑의 발원 내용은 대부분 내세를 기원하고 있다. 곧 극락정토로 가는 방편을 설하고 있는 『무구정경』은 신라 중대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수용될 수 있었다. 『무구정경』에 의거한 무구정탑의 건립은 신라 하대 문성왕대와 경문왕계 왕실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때 무구정탑의 발원자층은 주로 왕실이나 중앙의 진골귀족층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발원의 내용은 선조를 추선함으로 인해 생기는 공덕으로 현세에서의 복락을 기원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9세기 전후의 신라 왕실은 왕위쟁탈전으로 흩어진 家系를 통합하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문성왕은 자신이 속한 균정계와 他 家系인 헌정계의 혼인을 추진하고 헌정계 인물을 정치활동에 참여시키며 화합을 모색하였다. 문성왕대의 무구정탑 건립 의도는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헌정계의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왕위쟁탈전으로 중앙정치에서 밀려나있던 헌정계가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헌안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경문왕이 대표적인 헌정계 인물이다. 헌정계로 왕위에 오른 경문왕 역시 문성왕대와 마찬가지로 가계 통합을 시도하며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문성왕이 균정계와 헌정계 즉, 예영계의 통합을 시도했다면 경문왕은 더 나아가 원성왕계라는 큰 테두리 속에서 화합을 시도하였다. 이는 왕실가계의 통합으로 왕위계승전을 방지하고 왕실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진압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또한 경문왕의 親弟인 魏弘을 위시하여 측근정치를 펼쳐나갔다. 이때에 건립되는 무구정탑은 이러한 왕실의 의도를 잘 반영하였다. 선조를 추선하기도 하였으며, 호국의 의미가 강한 황룡사 목탑을 『무구정경』에 의거하여 중수하기도 하였다. 하대에는 지방 세력의 지지를 받은 선종과 민중들 사이에서 彌勒下生信仰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왕실에서는 이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선종사찰에 세워진 무구정탑과,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는 心地를 통한 무구정탑의 건립은 이러한 왕실의 의도를 나타내 준다고 하겠다. 또한 하대에는 비로자나불과 무구정탑이 같은 사찰에 함께 조성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밀교신앙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하대 화엄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 실천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세력의 비판을 받자 화엄종단은 교단을 결속하고 실천신앙의 목적에서 結社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화엄결사가 왕실의 발원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결국 왕실과 화엄종단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에 대응하고자 결속을 다지는 한편 새로운 대응방법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무구정경』은 선조 추선의 공덕으로 국토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또한 탑 신앙의 일반적인 특성상 민중신앙적인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민중들까지 포섭하고자 하였던 왕실과 화엄의 입장을 대변하여 유행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 하대의 무구정경신앙은 하대 왕실에서 주로 신앙이었다. 그들은 무구정탑 건립을 통해 선조를 추선하여 왕실가계의 통합을 모색하고 그 공덕으로는 왕실과 국토의 평안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불안정한 하대 왕실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 하대 왕실은 발호하는 호족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점차 기울어져 갔으며 왕실이 주체가 되었던 무구정탑의 건립역시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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