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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42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271 - 380 (11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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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숟가락이 출토되는 삼국시대 유적은 신라는 금관총과 황남대총과 같은 분묘로 한정되지만 백제는 무령왕릉과 신봉동고분, 표정리고분 등의 분묘와 부소산 관북리 추정 왕궁지, 왕흥사지 사리장엄구 등으로 좀 더 다양하고 형태도 세련되어 있다. 백제의 숟가락은 왕의 궁궐과 무덤, 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사찰과 귀족들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어서 청동숟가락의 사용주체가 누구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라와 백제의 차이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수구적이었던 신라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려던 백제의 의도적인 국제화에서 비롯된 차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숟가락이 실제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신라의 숟가락과 국자는 의례용으로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경향은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3점의 은제국자가 비실용적인 반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3점의 숟가락은 북위의 숟가락과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고 오히려 세련된 젓가락까지 더하여 출토되어 당시 백제의 문화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지역에서 출토된 숟가락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안악3호분의 부엌을 그린 벽화에서 국자가 보이고 있기 때문에 발견 가능성은 없지 않다. 그러나 4세기말 축조된 각저총에 밥상을 차려놓은 그림이 있는데 아무런 식도구가 그려져 있지 않고 무용총에도 음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부엌에서는 분명히 국자를 그리고 있는데 식탁에 숟가락을 그리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다. 신라의 수많은 고분유물 가운데 아직까지는 도제 숟가락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신라와 이 시기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에서도 숟가락이 출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특히 다량의 목제유물이 출토된 광주 신창동과 경산 임당동의 저습지유적에서 목제 주걱이나 국자는 발견되고 있으나 목제 숟가락이나 젓가락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은 차후 식생활과 관련지어 구명하여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통일신라에 들어서면 삼국시대의 상황과는 달리 경주지역을 비롯하여 대구, 창녕, 구례, 부여, 당진, 이천, 서울 등 가히 전국에서 숟가락이 발견된다. 경주안압지 출토 숟가락은 신라왕실의 숟가락 사용을 보여주는 것으로 거의 똑 같은 것이 일본 정창원에도 보관되어 있어 정창원 숟가락은 신라에서 제작된 것임을 바로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안압지를 비롯한 경주지역에서 젓가락의 출토 예는 아주 드물어 젓가락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지역에서 출토되는 숟가락 가운데 월성과 분황사에서 출토되는 것은 당시 왕실이나 왕실의 비호를 받던 불교 사찰에서 사용하던 것이며 왕경유적 출토 숟가락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주에서부터 청동숟가락의 사용이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비하여 청동숟가락의 출토량이 훨씬 적었고 사용목적도 의례용에 한정되었던 신라가 어떠한 사정으로 숟가락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 신라가 당나라의 조력으로 삼국을 통일한 다음 당과의 교류를 증대하면서 당시 당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화려한 금은기의 영향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청동숟가락의 사용이 점차 확산되어 갔다고 추정해 두기로 한다. 청동숟가락의 점진적인 확산은 대구칠곡유적에서 의례용으로 출토된 숟가락과 젓가락에서 증명되는데 삼국시대 신라에서 제례용으로 쓰던 숟가락의 전통은 감은사나 화엄사 사리장엄구에 숟가락이 포함되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며 부소산에서 출토된 숟가락이나 황해도 평산군 평산면 산성리에서 출토된 일괄유물도 모두 제사용 도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창녕 말흘리 퇴장유구에서 발견된 숟가락이나 국자, 당진 삼웅리, 한우물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의 청동숟가락은 청동숟가락의 사용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사찰과 관아라고 하는 사용계층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서울 호암산성 한우물유적의 제2우물지에서 출토된 숟가락은 그 형식이 안압지에서 출토된 형식을 계승하는 것으로 지방의 관리들이 사용하였던 실물이라고 생각된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청동숟가락은 상당히 귀한 것이었으므로 벼슬과 이름을 새겨 사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청동숟가락의 두가지 성격이 결국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금나라와 요나라등 북방의 영향과 결합하면서 무덤의 부장품으로 선택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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