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탐라문화 탐라문화 제59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05 - 125 (21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신라의 삼천당은 진흥왕 5년(544) 大幢과 함께 가장 이른 시기에 왕경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사조직이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태종무열왕 때 인물인 취도 열전에서 확인되는데, 이 글에서는 삼천당의 운용 양상을 검토하여 그 성격을 분명히 밝히려 하였다. 태종무열왕 5년에 벌어진 조청성 전투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에게 북쪽 변경의 33성을 빼앗긴 국가적 위기 상황 아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김흠운이 출전한 낭당이 포함된 군사를 일으켜 조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다시 취도의 삼천당을 출전시켰다. 이때 김유신의 부대가 함께 출전하여 조천성(도리천성)을 탈환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취도가 배속된 삼천당은 국가적인 위기상황에 해당하는 긴급한 상황에 주력군단들을 예비적으로 지원하는 부대로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취도처럼 승려였던 인물도 자원하여 배속될 수 있었던 병원 구성의 방식으로 보아 강력한 전투력을 보지한 군단은 아니었던 듯하며, 주력군단의 예비지원부대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진흥왕 5년에 대당과 함께 삼천당이 설치되었던 이유 또한 예비지원부대의 성격으로 대당에 대응하여 창설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태종무열왕대까지 이와 같이 성격으로 존재하던 삼천당은 통일 이후 신라의 왕경에 국왕권과 더욱 밀착된 대규모 군단인 9서당이 들어서게 되면서 왕경에서의 존재 이유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마침 이 무렵 지방제도가 9주 체제로 정비되면서 지방의 군제 또한 새롭게 정비되는 계기를 맞이하였는데 왕경의 예비지원부대의 성격을 지녔던 삼천당은 삼천당주―삼천감―삼천졸 계열의 군관조직을 근간으로 10정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10정은 대대감―소감―화척 계열의 기병부대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를 예비적으로 지원하는 기존 삼천당의 삼천당주―삼천감―삼천졸 계열의 군관조직이 결합하여 새롭게 성립한 지방군 체제였음을 밝혔다. 이와 같은 이면의 역사적 사실 속에서 軍號 十停의 분주에 십정의 異稱으로 삼천당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왕경의 삼천당이 십정 조직으로 전환 배치되어 지방군 체제 속에 새롭게 정립된 시기는 외삼천이라고도 불렸던 신삼천당이 설치되던 문무왕 12・16년 무렵이 아니라 9주 체제가 완비되는 신문왕 5년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