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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불교학연구회 불교학연구 불교학연구 제21권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219 - 25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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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禪宗 9山門 중 하나인 師子山門은 일반적으로 澄曉大師 折中(826-900)에 의하여 개창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절중에 의하여 개창된 사자산문과 후대 9산문 중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구별하여 볼 필요가 있다. 절중이 창건한 사자산문은 사자산 興寧禪院이라는 개별 禪場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나말여초 전국 각지에 등장한 많은 禪場들 중의 하나였다. 이와 달리 9산문 체제가 형성된 이후의 사자산문은 절중의 스승인 道允을 始祖로 하는 선승들 전체를 포괄하는 禪의 門派 즉 禪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사자산 흥령선원과 도윤이 창건한 쌍봉산문을 비롯한 다수 禪場의 출신들이 모두 포괄되었다. 사자산문의 실제 개창자가 절중임에도 후에 9산문 중 사자산문의 개산조가 道允으로 이야기된 것은 이러한 산문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 禪場을 의미하던 사자산문이 禪門의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선종의 9산문 체제가 형성된 11세기 전반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고려의 정치․사회체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고 귀족들의 家門이 발전하던 사회적 상황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한편 도윤이 창건한 쌍봉사가 아닌 사자산 흥령선원이 道允의 선법을 계승한 문파들의 중심 사찰로 등장한 것은 고려초 흥령선원의 위상 강화에 의거한 것으로 생각된다. 折中이 산문을 창건한지 4년여만에 전쟁의 여파로 몰락하였던 흥령선원은 절중이 입적할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하였지만 절중 사후 40여 년만에 당시 중앙과 지방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대두되었던 충주세력의 후원을 받아 중흥되었다. 절중은 흥령선원 창건 이전부터 이 지역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그러한 인연을 토대로 그의 문도들은 후삼국의 혼란이 수습된 고려초에 사자산 지역을 포괄하는 충주 세력의 후원을 받아 흥령선원을 중창하고 스승 절중의 탑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충주 유씨를 외가로 하는 왕자들이 계속하여 왕위를 계승하는 상황에서 흥령선원과 그 개창자 절중의 위상은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흥령선원의 위상이 확대된 결과 11세기에 9산문 체제가 형성될 때에 道允의 계보를 아우르는 문파는 자신들의 명칭을 사자산문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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