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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69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425 - 46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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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909년 중일간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형식적으로 간도 영유권 문제가 종결되었고, 공식적으로 간도라는 행정적 명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에서 통치하였던 중화민국 시기 관내지역에서 출판된 신문 잡지에 어떠한 ‘간도’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는지를 분석하여 중화민국의 ‘간도’ 인식을 추적하였다. 중국 상해도서관 「近代文獻期刊目錄」에 힘입어 중화민국 시기 101건의 간도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이 7가지 내용 범주로 나눌 수 있었다. ① 간도의 범주와 명칭유래, ② 간도지역 자연 조건과 지역적 특성, ③ 간도문제의 기원과 해결, ④ 간도협약과 만몽조약과의 관계, ⑤ 간도지역 사회와 경제, ⑥ 간도지역 항일 운동과 간도경찰서 설치, ⑦ 간도의 한국 귀속에 대한 위기의식과 해결방안이다. 중화민국 시기 신문 잡지에 보도된 이상의 간도관련 내용을 시기적으로 구분해 보면 주요하게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기사가 집중되었다. ① 1915년 만몽조약 체결된 후 간도협약과의 내용상 충돌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와 ② 1928년 5.3참안 이후 일본의 침략성이 드러났을 때 그리고 ③ 만주국에서 간도성을 구분한 후 1935년 간도성장이 한국을 방문하여 간도를 한국에 귀속시키려 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을 때이다. 따라서 중화민국 시기 신문 잡지에 보도된 간도 관련 기사와 시기를 보았을 때 기본적으로 일본과 관련된 사안이 발생했을 때마다 간도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중국인에게 알리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의 최종 목적이 전 중국을 장악하는 것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간도문제로 시금석을 삼으려는 태도가 있었다. 일본이 濟南 출병이나 福建 침략, 旅大 점령했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중국을 국난에서 구하는 방편으로 간도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화민국 시기 ‘간도’ 인식이란 기본적으로 일본의 침략성을 염두에 두고 일본이 간도문제를 통해 중국으로 침략을 확대하거나 영구 점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하나는 간도가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여 중국 동삼성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러시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국제관계가 복잡하게 교착하는 간도지역을 확보하여 이를 통해 동아시아를 제압하려는 의식도 있었다. 위와 같은 사실을 중국 국민에게 분명하게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간도의 명칭과 범주 등이 일본의 침략으로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하였고 일본의 침략성이 드러났다고 인식할 때마다(1915, 1928, 1935년 등) 간도 문제를 재검토하였다. 그 외에 간도에서의 사회 경제 상황, 항일운동 및 간도 경찰서 설치 등의 문제에 주목한 것도 일본과 간도와의 관계 및 영향력의 깊이와 넓이를 확인하고자 할 때 유용한 정보로 활용되었다. 중화민국 시기에 구체적으로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간도의 범주나 명칭 등에 대해 새삼스럽게 고려했던 이유는 간도 지역의 중요성과 한인과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간도문제가 무엇이었으며 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에 대해 총체적으로 검토하여 위기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간도협약과 만몽조약과의 사이에서 내용상의 충돌로 발생하는 한인 관할권 및 거주권, 소유권 등의 문제로 한인 통치권을 상실했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간도협약 체결 이전의 간도문제를 상기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간도’ 인식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간도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청조와 조선과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1712년 백두산 정계비 설정, 1885년과 1887년의 감계 담판 등의 역사적 사실이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간도문제는 청과 일본의 문제이기 이전에 발생했던 조선과 청조와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간도문제를 단지 일본의 침략 야욕 때문에 조작한 문제로 인식함으로써 일정 정도 역사가 왜곡되었다. 이는 중화민국이 간도문제가 촉발되었던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일본의 대중국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에서 간도문제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중화민국의 시대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간도가 한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영유권 문제 뿐만 아니라 소련과 근접하여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지리적 중요성이 있으므로 당시 신문 잡지에 간도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移民實邊과 변경지역 관리 그리고 한인 귀화 문제 정리인데, 이는 중화민국 시기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시기까지 오면서 간도문제를 정리하는 중요한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효용성과 중국의 변경관리 방안을 이해하는데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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