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52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87 - 98 (1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동한 帝陵에 대한 고고학적인 작업은 아직도 한계가 있으며 무덤주인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 확실한 판단은 더욱 명확한 증거를 필요로 한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조사 자료에 의하면 모든 東漢의 帝陵은 각기 封土, 地宮, 陵寢건축과 陪葬무덤 등의 몇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封土는 조사의 정황 혹은 초기 관측의 항공사진(1958년)을 막론하고 봉토는 모두 원형이다. 地宮은 문헌기록과 고고조사에 의거하여 알 수 있으며 동한의 帝陵은 이미 4개의 묘도에서 단일 묘도로 변화하였다. 陵寢建築은 현재까지의 시굴조사 결과 동한의 陵寢건축은 모두 봉토의 동쪽 혹은 남쪽에 위치한다. 合葬과 陪葬 문헌과 이미 발굴된 동한 王侯級의 다른 묘장에 의거하여 추측해보면 동한시기에는 아마도 帝王과 皇后를 하나의 방에 合葬하는 풍속이 성행하였던 것 같으며 또한 ‘同塋不同陵’의 합장 형식도 있었다. 동한의 陵寢과 서한의 陵寢을 서로 비교해 보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니 즉 刑制의 변화는 물론이고 陵寢건축에 있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한 陵寢 규모는 西漢시기에 비하여 훨씬 작아졌다. 그 이유는 첫째, 東漢 경제의 발전이 점차 위축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국가의 경제력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층의 통치자가 ‘薄葬’을 제창한 결과인 동시에 무덤의 도굴 풍조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동한의 陵寢제도에서 특별히 주시해야 할 점은 비록 葬制가 간결한 추세로 갔다. 하지만 喪制, 祭制의 내용은 확대되어 갔다는 점이다. 兩漢시기에 帝王을 대표로 하는 中原 주체세력의 喪葬禮儀 문화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다시 말하면 兩漢시기는 비록 다민족이 통일된 중앙집권제 국가의 시기였지만 漢文化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承中之變’은 반드시 찾아볼 수 있으므로 400년 역사를 지닌 兩漢文化의 動態를 單一指向的인 ‘大一統’문화로 간단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12)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