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07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37 - 75 (3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발해는 獩貊系 高句麗遺民과 肅愼系 靺鞨族으로 구성된 多民族 國家였고 그 가운데 선진적인 고구려 遺裔들이 지배계층을 형성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두 민족은 발해라는 역사 공동체 속에 때로는 상호 협조하고 때로는 반목하면서 200여 년간 역사를 유지했다. 하지만 渤海가 멸망한 이후에 그 구성원은 다시 渤海人과 女眞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역사를 개척했다. 反遼感情을 가진 이들 두 종족은 契丹 통치에 저항했고 마침내 阿骨打가 金을 건국하여 遼를 멸망시켰다. 여진이 遼東으로 확장하고 금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발해인은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들은 과거에 발해의 주민으로서 지역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反遼情緖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또한 수적으로 소수였던 女眞은 그들의 적극적인 협력자가 필요했으므로 발해인을 적극적으로 회유했다. 그 결과 발해인은 금조에서 특별한 저항 없이 通婚, 任官 등을 통해 스스로를 보존하였다. 그러나 여느 왕조와 다름없이 피지배 민족에게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금조 후기에 들어 발해인은 정치적으로 여진 통치자에게 배척을 받았으므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그러나 주의할 만한 것은 발해 상층인물과 여진 통치 집단의 갈등으로 인해 이들 양 민족이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며 금조 치하에서 발해인은 시종 순종하였다. 요대에서와는 달리 줄곧 어떠한 반항행위도 없었으므로 그 민족지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발해인은 선진문명의 소지자로서 金史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先進 農耕文化뿐만 아니라 文物과 典章制度를 전해주었고 용맹했던 性情은 장수로서 요ㆍ금의 영토 확장 및 방위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文藝로 이름을 떨친 집안도 있었다. 무엇보다 금조에서 渤海人 출신의 后妃가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 금대 貞懿皇后는 세종의 良母일 뿐만 아니라 금 일대의 명군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3명의 황제 어머니가 발해인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에서 발해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7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