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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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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1권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79 - 10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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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 중국에서 전개된 국채상환운동은 헤이그만국평회회의 이후 제국주의 열강이 열악한 중국 재정을 이유로 삼아 중국 재정에 대해 간섭할 것이라는 우려가 민간에 확산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상인단체를 중심으로 발기되어 교육계, 노동계, 정계, 여성계 등 거의 전 국민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그 역량을 확장해 나갔다. 처음 天津에서 제창된 이 운동은 上海, 杭州, 北京 등지에서 적극적인 동조가 이루어지면서 이를 바탕으로 거의 전국적인 범위의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애국주의를 내걸고 의연금 갹출 형식의 방법론에 고착되면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소기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한국 국채보상운동이 1907년에 이미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2년 반이나 늦게 본격화 되었다. 이는 1909년말에 이르러 비로소 상인들의 경제적 위기 의식, 신사층의 국회청원운동의 난항 등 기타 요소들이 조합되어 격발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국채보상운동과 달리 지방장관 등 관료층과 신사층의 적극적인 참여가 돋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치적 배경에서 시작한 측면이 강하였던 만큼 정치적 현안이었던 국회청원운동의 아류로 휩쓸려 들어가면서 국채상환운동의 동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고 말았다. 또한 경제적 배경에서 시작한 측면이 강하였기에 지역 단위 분담 형식으로 거두려는 외형을 보이게 되었고, 모금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 동력이 상실되고 말았다. 이는 한국에서의 국채보상운동이 근검절약의 실천을 통한 모금운동이 핵심이었던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말 중국에서의 국채상환운동은 19세기말 20세기초 반제국주의 운동의 맥락을 잇고 있던 외세배척운동, 외국차관 반대운동, 외국상품 불매운동, 국권회수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애국운동이었음은 분명하다. 외채 상환이라는 명분하에 관료, 상인, 학계로부터 기층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경, 천진, 상해 등 대도시로부터 몽골까지 거의 전국으로 확산된 대중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이 이후 중국에서 공화혁명과 신문화운동의 전개를 가져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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