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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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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28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231 - 26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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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여름과 1791년 봄 북경은 역사상 한중 지식인이 가장 활발하게 교유했던 현장이었고, 그 주역은 박제가였다. 이 시기 박제가는 거의 100명에 가까운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유했는데,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물론 학문과 예술의 차원에서도 상당한 폭과 깊이를 갖춘 것이었다. 이는 이후 북경에서 유행한 한중 지식인 교유의 토대가 되었다. 도대체 이 시기 왜 박제가는 이토록 북경 지식인들과의 교유에 적극적이었으며, 역사상 유례없는 교유를 가능하게 했던 북경의 사회문화적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윤리라는 외피 속에 감추어져 있는 우정의 심리적 기원을 토대로 살펴본 결과 박제가의 우정은 조선의 주류 사대부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감, 혐오와 동경, 적대감과 공포감 사이에서 탄생한 다분히 병리적인 것이었다. 박제가의 우정은 조선의 동류(서얼 지식인)와 청나라 지식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는데, 이는 ‘조선 ․ 사대부’를 배제하면서 만들어진 안티테제이다. 박제가의 우정에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조선의 중인 및 청조 지식인들과의 동일성이 아니라, ‘조선 사대부’와의 불화와 갈등이다. 박제가는 홍대용과 만나면서 淸人과의 교유라는 삶의 새로운 출로를 발견했지만, 1778년 1차 燕行에서 청나라 지식인들과 거의 교유하지 않았다. 1777년 과거에 급제하고 정조 임금을 만나면서 세계와의 동일성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1차 연행의 전 기간을 󰡔北學議󰡕 저술 준비에 전념했다. 이후 박제가는 규장각 검서관 시절을 시작하는데, 40세에 가까워지면서 박제가는 관리로서 심각한 동일성의 균열과 회의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박제가는 심각한 상실감과 회의감의 상태에서 1790년의 2,3차 연행을 맞이하게 된다. 1790, 1791년의 북경 교유는 이러한 박제가의 개인적인 처지 및 심리상태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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