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시기 20년 가까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각자의 관점을 고수하며 논쟁을 지속한 주희와 육구연의 관점은, 佛教와 儒教가 긴 시간동안 극하게 대립했던 것처럼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元․明․清에 이르는 수백 년간 학자들의 관심대상이 되었고, 그 논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실 주희와 육구연이 직접 만나 논쟁한 것은 두 번이 전부다. 둘은 淳熙2年(1175) 여조겸의 주선으로 鵝湖寺에서 처음 만나 공부 방법에 대해 논쟁한 이후, 순희8년(1181) 南康 白鹿洞書院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갖고 학문적 관점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밖에는 모두 문인들이 전해주는 소식이나 직접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각자의 관점을 고수하며 토론을 지속하였을 뿐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긴 역사 속에서 전개된 주륙논쟁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 핵심 근거로 둘의 만남으로 들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明代 程敏政은 道一編을 지어 주희와 육구연은 아호모임에서 극한 대립을 하여 서로의 관점에 분명한 차이를 드러냈지만, 백록동 서원에서의 만남이후 각자의 장단점을 취사선택하여 道問學과 尊德性 공부를 병행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주희가 백록동서원에서의 만남 이후 비로소 육구연의 관점에 호평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진래나 진영첩 등은 주륙논쟁에 대한 문헌고증을 통해 백록동서원에서의 두 번째 만남은 아호모임과 달리 ‘和諧’ 위주의 모임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백록동서원에서의 만남을 심층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모임 이후 주희가 문인들에게 준 편지나 육구연이 남기고 있는 자료를 분석해 보면, 둘 사이에는 여전히 학문적 관점에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고 긴장감마저 감지되고 있다.
백록동서원의 두 번째 만남에서 육구연은 지금 이 순간 드러나고 있는 본심을 믿지 않고 그저 ‘思索’을 통해 理를 추구하려는 주희의 관점이 개인적인 ‘意見’이고 是非만을 일삼는 ‘議論’이며 理를 하나로 고정시켜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定本’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주희는 사특한 의견(邪意見)이나 쓸데없는 의론(閑議論) 등은 학자들이 마땅히 경계하고 없애야 할 것이겠지만, 옳고 그름․바름과 치우침을 분별하는 기준인 理는 제거해서는 안 되며 격물궁리를 통해 확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바른 의견(正意見)과 좋은 의론(好議論) 마저 제거하려는 육구연의 관점이 ‘空寂’한 것을 추구하는 禪宗과 다를 바 없다고 응수한 것이다. 반면, 육구연은 理가 마음이 인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본심이 창출하는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敬’과 같은 인위적 노력이 아닌 일체의 의도가 사라지고 고요한 상태가 되었을 때 저절로 드러나는 본심을 ‘存’하는 공부를 역설하였다.
이렇게 주희와 육구연은 백록동서원 모임에서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절충하려 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관점을 견지하였다. 둘의 관점은 和會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굳이 주희와 육구연 형제가 같은 점이 있다고 말한다면, 황종희가 말한데로 동일하게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가르침인 유학을 받아들이고 공맹의 가르침을 종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공부방법에 대한 관점 차이는 본체에 대한 다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결말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