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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홍영의 (국민대)
저널정보
한국중세고고학회 한국중세고고학 한국중세고고학 제5호
발행연도
2019.6
수록면
161 - 201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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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시대 고려 왕릉에 대한 실태와 관리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개성 지리지 등 관련 자료를 통해 61기에 달하였던 고려 왕릉이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에 대한 관리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현재 파악된 고려시대 재위 국왕, 추존된 국왕, 그리고 왕비를 포함한 왕릉은 모두 61기이다. 그러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왕릉은 현재 20여기에 불과하다. 고려는 왕릉들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였으나 무인집권기와 몽골침입 등을 거치면서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게 되면서 많은 왕릉들이 도굴의 피해를 입었고, 그에 따른 수리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멸망 이후 이 왕릉마저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은 고려의 태조를 비롯한 전조 8왕의 릉에만 수호인(守護人) 두었고, 세종은 태조(顯陵)·현종(宣陵)·문종(景陵)·원종(韶陵)의 릉에만 수호인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의 관(官)으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다. 때문에 4명의 왕을 제외한 나머지 왕릉은 관리가 소홀해지게 되었고, 구전으로 왕릉의 위치 등이 전승되는 수준이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고려 왕릉은 다시 방치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왕릉의 릉주는 양란 이후 대부분 실전되었다가, 현종 대에 다시금 고려 왕릉을 찾아서 비정한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현종은 1662년부터 고려 왕릉의 보수 및 관리, 투장(偸葬) 조사 등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로써 고려 왕릉이 61기 가운데 조선 현종대의 적극적인 간심(看審)의 결과로 고려 왕릉 43기까지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릉주를 알 수 없는 왕릉에 대해서는 태조릉 뒤에 위치한 7릉을 비롯하여 제1명릉, 제2명릉. 소릉동의 5릉, 냉정동의 3릉 등으로 통칭하여 이때부터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조는 전조 왕릉의 금표(禁標) 내에 매장하거나 범하여 경작(耕作)하는 것에 대한 처벌 규정을 정한 ‘전조제릉금표수교(前朝諸陵禁標受敎)’를 내려 준수하도록 하였고, 정조 때는 고려 왕릉으로 39릉(陵)이 파악되었고, 릉호와 릉주가 파악되지 못한 왕릉에 대해 냉정동(冷井洞) 제1릉·제3릉과 월로동(月老洞) 제1릉으로 정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려 왕릉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를 통하여 1818년(순조 18) 개성유수 조종영(趙鐘永)이 고려 왕릉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개성41기와 장단·풍덕·강화·고양의 16기 등 57기가 파악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867년(고종4) 고종은 고려 왕릉을 일제히 정비하여 57기에 대해 ‘고려 왕릉’이라고 표석을 세웠다. 이들 명칭은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왕릉조사 사업 때까지 이어지고, 그 결과물이 1916년 작성된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에 표기된 53기의 고려 왕릉의 위치이다. 이는 고종 4년의 표석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므로, 고종 때 비정된 릉명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도 그대로 불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 왕릉의 현황과 실태
Ⅲ. 조선시대 고려 왕릉의 보존과 관리
Ⅳ. 맺는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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