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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명찬 (덕성여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시학회 한국시학연구 한국시학연구 제57호
발행연도
2019.2
수록면
199 - 23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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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에 있어 자유시 운동은 특정 문화권에 고래로부터 전래해온 정형시라는 문화적 전제 관습과의 싸움에서 시작되었다고 이해되어 왔다. 근대를 선도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이웃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에도 이 설을 지지하는 정확한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이다. 주요한, 김억, 황석우 등의 초기 시인들이 프랑스 상징시의 전통 파괴운동을 본받아 자유시 운동을 주도해 왔다는 것이 그 동안의 통설인데, 우리 근대 문학 운동이 파괴한 전래의 정형시가 무엇인가 물으면 대답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조나 가사를 근거로 들기 쉽지만 엄밀히 말해 두 가지 다 정형시에 도달하지 못한 양식이었다. 시조는 문학적 읽기의 대상이 아니라 노래의 가사(歌詞)라는 치명적 한계가 있었고, 가사(歌辭)는 소리 내어 읽는 장르라는 점에서 정형률에 이를 확률이 높았지만 기행가사나 유배가사처럼 장형화의 길로 나아감으로써 정형시가 되지 못한 채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우리의 근대시사 초기는 싸워 극복할 시의 모형이 없는 관계로 4.4, 7.5처럼 자수율에 얽매이거나 아예 형태를 버린 산문시형에 매달리는 극단의 양태를 보였다. 흔히 아는 대로 정형시-자유시-산문시의 단계를 거쳐 시문학의 근대화가 진행된 것이 아니라, 자수율 기반의 ‘정형시 만들기’와 ‘산문시 쓰기’ 사이에서 어정쩡하고 힘든 모색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자유시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 중반의 <시조부흥운동>은, ‘정형시 만들기’와 ‘산문시 쓰기’ 사이에서 흔들려 왔던 우리 초기 문학인들이, 시조야말로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전래의 정형시가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문학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시조에 관한 논의는 1930년대 가람 이병기에 의해 일단락되었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부분은, 시조의 읽기 방법을 정형적으로 개발하여 대중화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두 가지 질문
Ⅱ. 전사(前史)로서의 ‘자유시 운동’의 의미
Ⅲ. <시조부흥운동>의 경과
Ⅳ. <시조부흥운동>의 의의와 시조의 정형성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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