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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심일종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국립민속박물관 민속학연구 민속학연구 제43호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49 - 7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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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의 공동체 신앙의 큰 버팀목이 되어왔던 마을제당을 추가로 하나 더 소개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곳에 남아있는 중수기(重修記)를 통해 유교국가의 이념적 틀에서 조선후기 동해시 ‘삼화동신사’의 출현배경과 민속신앙화의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역적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마을단위에서 제향하는 성황사의 출현이 조선시대 군현단위에서 운영되던 단묘(壇廟), 즉 사직단, 문묘, 성황단, 여(제)단에서 제사하는 유교 의례와는 조금 다른 역사적 맥락을 갖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로인해 오늘날 동해 지역에 전승되는 마을 성황제는 언제부터 있었는가와 같은 물음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성황지신’, ‘토지지신’, ‘여역지신’을 모시게 되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본고를 통해 그 물음들이 말끔히 해소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을 단위에서 전승되는 성황제가 조선후기 유교화의 진전에 따라 민속신앙화가 한결 더 추동되고 있었다는 점은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마을 성황사가 지닌 위상이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을 뿐만 아니라 지역 내의 마을과 마을의 관계에 따라서도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본고에서도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 이력을 지닌 마을성황제[洞祭]의 경우 오늘날 그 마을이 처한 상황과 제의의 현장과는 결이 다른 인식론적 기반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생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마을제당의 기록물을 통한 연구방법론은 자칫 마을성황제의 과정에만 주목하거나 마을 제보자의 기억과 구술에 의존할 때 발생하는 성급한 판단을 보완하면서 지역적 차원의 이해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변동 속에서 전통의 공동체 의례가 축소되는 가운데서도 지속되는 동해시 지역의 ‘성황제’의 역사민속적 의미와 가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본고는 2장에서 동해시 삼화동 6통 상촌마을의 입지와 유래 및 현재에도 전승되는 마을제사에 대해 개관을 할 것이다. 3장에서는 이곳의 제당에 전해지고 있는 「삼화동신사중수기(三和洞神社重修記)」를 해석하고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성황사 본당의 주심도리에 쓰여진 ‘이안기(移案記)’를 통해 그 역사성을 되짚고자 한다. 그 결과 이 작업은 19세기와 20세기 삼척부(三陟府)의 마을신앙의 진전을 알리는 ‘중수’와 ‘이안’에 앞서 유풍(儒風)의 사회적 승인의 원인으로 도입된 ‘이사(里社)’제도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교민속’의 신앙화 논의를 가능케 하였음을 보이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 다루는 ‘성황제’는 유교화의 진전이라는 조선후기의 보편적 논의를 담되, 지역적 특수성의 측면에서 삼척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사제’ 도입과 실천으로 표상화 되었음을 밝혀보고자 한다.
한편 오늘날 비록 삼화동 성황사가 ‘상촌마을제당’의 제사로 지역적 범위와 주재집단이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오랜 전통은 성황신으로 대신되는 신격이 기복과 기우는 물론이고 자손의 운수와 마을의 안녕을 좌우한다는 공동체의 강한 믿음체계를 담지하고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이 유교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리고 효험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땅에 붙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있어서 대체할 만한 적합한 신들이 있지 않는 한 토지신과 여역신은 지금도 주목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삼화동신사중수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문화의 변화에서도 여전히 살아 기능하는 힘을 증거 해주는 민속자료로 파악하고자 한다.

목차

1. 머리말
2. 삼화동 ‘상촌마을’과 마을제사
3. 삼화동 성황사의 형성과 조선후기 ‘이사제’ 도입
4. 결론 : 방법론적 제언을 덧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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