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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소영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2호
발행연도
2018.8
수록면
151 - 181 (31page)
DOI
10.21490/jskh.2018.08.7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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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근대적 지식을 습득하는 한편 실체로서 ‘소사이어티’를 경험하고 참여했다. 윤치호는 ‘소사이어티’를 ‘공공성’, ‘공익’을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결성된 단체, 또는 ‘공공성’,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토론하고 공론을 형성해 가는 ‘공론장’으로 인식했다. 그는 귀국 후 1897년부터 7월부터 본격적으로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토론회를 개설하는 등 협회의 성격을 ‘공론장’으로서 ‘사회단체’로 변화시켜 갔다. 윤치호를 비롯한 독립협회 세력은 ‘개화’라는 ‘공익’ 실현을 최우선, 최상위의 목적으로 설정하면서 ‘개화’에서 벗어나거나 방해가 되는 ‘사익’ 추구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즉 개개인의 ‘사익’을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사회’의 성립을 추구하면서도 ‘공익’을 ‘사익’보다 우선시 하며 ‘공익’에 해가 되는 ‘사익’을 부정하는 ‘양가성’을 보였다. 이와 같은 ‘사회’ 지향의 양가성은 1905년 이후 ‘국권’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 ‘민권’보다 ‘국권’을 우선시하는 인식과도 맞물렸다. 1900년대에 들어 윤치호의 일기에 등장하는 ‘사회’의 용례는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단체, 조직, 학회 등을 의미했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 이후 ‘사회’를 통감부와 친일내각을 대신해 대한제국의 ‘개혁’을 추진하고 ‘국권’을 회복할 주체로 보고 다양한 ‘사회단체’ 활동을 전개했다. 1900년대 ‘사회’에 대한 논의는 주로 개인, ‘사회’, 국가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개인이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의 확장 또는 집합이 국가라고 보았으나 국권 상실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개인보다는 ‘사회’, ‘사회’보다는 국가를 우위에 두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그 결과 각각의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리’는 국가의 ’공리’에 기여하거나 합치되어야 ‘공익’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이 ‘공익’으로 규정한 것은 ‘부국강병’, ‘문명개화’였으며, 궁극적으로 ‘국권’을 회복하여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독립협회와 이후 ‘사회단체’ 활동을 통해 윤치호가 추구했던 ‘공익’ 역시 동일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일본제국의 식민지배가 지속되면서 윤치호는 ‘국권’ 회복이 아닌 ‘문명화’만을 ‘공익’으로 규정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식민권력과 타협하고 협력하는 ‘사회’ 활동을 전개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공론장’으로서 ‘소사이어티(Society)’ 경험과 이해
3. 독립협회 활동과 ‘사회’ 지향의 양가성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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