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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영애 (경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96號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5 - 3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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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안에는 ‘미남불’이라 불리는 석불좌상이 있다. 현재 광배도 없고, 대좌도 일부를 잃었지만, 불신은 거의 손상된 곳 없이 완전하다.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이 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불상이 일제강점기인 1912-1913년 무렵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와 현재 청와대에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불좌상이 어떤 연유로 청와대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원래 경주의 어디에 봉안되어 있던 것인지, 그리고 이 불상의 제작 시기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려했다.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은 원봉안처 문제였다. 원봉안처에 관해 적고 있는 기록은 불상을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온 후 20년도 더 지난 1934년과 1939년의 것뿐인데, 두개의 중요한 자료가 5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청와대 불상은 경주 도지동 移車寺址가 원봉안처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남아있는 자료는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가 이거사지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와 관련해 가장 이른 기록인 1934년 『매일신보』 기사가 경주 남산이라고 못 박아 이야기하고 있고, 또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같은 불상이 경주 남산 약수계에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청와대 불상과 같은 형식의 삼단사각대좌 불상이 경주 남산에만 남아있는 것도 원봉안처가 도지동 이거사지라고 단언하기 어렵게 만든다.
한편 1917년 『조선고적도보』 해설편에서는 청와대 불상을 ‘경주의 모처에 있던 불상’이라고 적었다. 1917년의 이 기록은 옮긴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지만, 원봉안처를 밝히지 않았다. 원봉안처를 정말 몰랐기 때문인지, 혹은 출처를 밝히기를 곤란한 사유가 있어 의도적으로 ‘모처’라고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을 소유하고 있던 고다이라 료조[小平 亮三] 자신도 원봉안처가 알려지는 일을 꺼렸을것이니 지금 남겨진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통해 원봉안처를 밝히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 불상은 아픈 기억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역사이다. 청와대 불상의 내력에 보다 집중을 하다 보니 삼단사각대좌의 분석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통일기 신라 하대 삼단사각대좌는 남아있는 예가 드물고, 더욱이 중대에 신장상을 조각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는 것이다. 청와대 불상은 다소 비만해진 신체, 양 발목 앞의 부채꼴 옷 주름을 대좌 위에 조각한 점, 삼단사각대좌와 중대 신장상 형식을 통해 9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고려 전기 삼단사각대좌의 유행을 예고하는 그 시작점에 있다는 점에서도 또 의미가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일명 ‘청와대 불상’의 현상과 내력
Ⅲ. ‘청와대 불상’의 삼단사각대좌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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