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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문상 (가천대학교)
저널정보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아시아문화연구 아시아문화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293 - 317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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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55년 주비처로 출범한 중양옌쥬위안 진다이스옌쥬숴(진스숴)가 1965년 정식으로 성립할 때까지 안팎에서 직면해야 했던 시비와 오해, 그리고 비판 등이 타이완 역사학계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제시하고자 했다. 진스숴와 그 책임자 궈팅이가 대면해야 했던 시비와 비판은, 북파와 남파라는 민국기 이래 양대 인문학풍의 경쟁과 연관되며, 따라서 해당 시기 진스숴의 성장은 양대인문학풍의 타이완 역사학계에서의 소장(消長)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주비처 주임에 임명된 궈팅이는 남파를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학자는 아니었지만, 출신 대학과 사상적 경향으로 볼 때 남파적 성향, 즉 문화보수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그의 인사에 문제를 제기한 측은 중양옌쥬위안 리스위옌옌쥬숴소속 연구원이었으며, 진스숴의 포드재단 연구지원사업을 문제 삼았던 측은 타이완대학 역사학과 소속 교수들이었다. 이들은 베이징대학의 인문학풍에 뿌리를 둔 이른바 북파 인문학풍의 역사학자였다. 특히 우샹샹 교수는 궈팅이에 대한 경쟁의식이 남달랐다. 동일한 중국근현대사 전공자들로, 양자는 근대사를 보는 관점이 달랐고 소속 기관이 달랐다. 양자의 경쟁구도는 1962년을 경계로 변화를 보였다. 궈팅이가 이끌고 있었던 진스숴는 포드재단으로부터 막대한 연구비지원을 받아 연구 활동을 본격화한 반면, 우샹샹은 국가원수 모독사건과 연루되면서 연구활동에 큰 타격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진스숴는 중국근대사 연구의 거점으로 성장해 갔고 궈팅이의 학문적 영향력 또한 확대되어 갔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진스숴 주비처 발족과 인사 시비
Ⅲ. 진스숴와 타이완대학 역사학과의 경쟁
Ⅳ. 진스숴의 포드재단 연구지원사업 선정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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