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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문재숙 (이화여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악교육학회 국악교육 국악교육 제42집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35 - 80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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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가야금 연구」는 「고대 가야금연구」, 「고려시대 가야금 연구」에 이어서 우리나라의 가야금 역사에 관해 연구해본 것이다.
조선시대 가야금에 관해 연구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시대의 시대구분을 실제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분류하기 쉽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초기(태조(392)~성종(1494))․중기(연산군(1494)~경종(1724)) · 후기(영조(1724)~1910)로 3기로 나누었다. 『조선왕조실록』, 문집, 그림자료에 나타난 가야금에 대해서 사료(史料)를 수집하고 시기별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다행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초기사료 중 문집, 그림자료가 전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병자호란(1636) 등 왜침을 겪으면서 소실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문집의 가야금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았으며, 중기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그림자료를 살펴보고 더불어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가야금과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거문고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후기 또한 초기, 중기와 동일하게 『조선왕조실록』과 선비들이 남겼던 문집, 그리고 그림자료에 남겨진 가야금을 살펴보았으며 더불어 후기에 편찬된 가야금 악보와 가야금 산조의 출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에는 가야금 관련 문집을 살펴보면 금(琴), 현(絃), 사(絲), 12현(十二絃) 등으로 가야금이 불렸는데 조선시대 초기에는 현(絃) 또는 가야금(伽倻琴)으로 불리어 졌다.
세종시대부터 가야금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세종 때 수양대군(훗날 세조, 세조의 대군시절 이름)이 가야금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외가의 가풍과 명망 있는 집안 분위기가 그대로 세종의 집안에서도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이후에는 왕가에서 연주되는 기록이 없는데, 이는 세종 이후에 유교문화가 정착되면서 가야금보다는 거문고를 선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거문고가 유교사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헌자료는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의 거문고 악보는 55여 종이 전하는 반면 가야금 악보는 『졸장만록(拙庄漫錄)』과 『방산한씨금보(芳山韓氏琴譜)』 등 에만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의 유교를 중심으로 예악(禮樂)사상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또한 『졸장만록』은 가곡, 졸장만록 이후에 간행된 『방산한씨금보』는 기악곡을 전하는데 이는 성악곡에서 기악곡화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림자료를 보면 칠태부인 경수연도(慶壽宴圖)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양반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고, 피리, 대금, 해금 등의 관악기는 댓뜰 아래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많다. 이것은 가야금이나 거문고가 음량이 작아서 야외에서 연주하기에는 제한될 수도 있었겠지만, 관악기 보다는 현악기 연주한 사람들이 좀 더 대접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1796년 졸장만록이 만들어 졌는데 악보 내용은 거의 가야금 중심의 악보이다. 송만재(宋晩載: 1788~1851)가 쓴 『관우희(觀優戱)』가 1810년도에 만들어 졌고, 판소리가 19세기 전후로 성행했던 것으로 볼 때 가곡을 뒤를 이어 판소리가 성행했으며 이어서 1916년 『방산한씨금보』에 나타난 기악곡 중심의 가즌영산회상으로 이어졌다. 가야금 산조 창시자인 김창조(金昌祖: 1865~1919)가 1895년에서 1919년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김창조는 가곡, 판소리, 민간풍류를 두루 섭렵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야금 산조 음악 속에는 가곡과 민간풍류와 판소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가야금 산조가 위대한 악곡이 탄생된 것은 그 전에 있었던 가곡, 판소리, 민간풍류의 악곡들의 우수한 점들이 응집되어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판소리 에서는 성음을 가곡에서는 가곡성 우조를 포함한 평우조 선법을, 민간풍류에서는 가야금 연주수법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김창조는 가곡, 민간풍류, 판소리, 퉁어(퉁애), 해금 등 까지도 섭렵할 수 있었던 명인이었기 때문에 가야금 산조 악곡을 창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조선 초기 가야금 [태조(1392)~성종(1494)]
Ⅲ. 조선 중기 가야금 [연산군(1494)~경종(1724)]
Ⅳ. 조선 후기 가야금 [영조(1724)~1910]
Ⅴ. 결론
참고문헌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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