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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孫煥一 (대전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45號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5 - 28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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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古代의 記錄에는 金石文의 紀念記錄, 行政文書의 생활기록, 佛經을 적은 寫經記錄으로 大別할 수 있다. 기념기록인 금석문은 石碑, 靑銅 기록 등의 자료가 남아 傳하고, 행정문서인 생활기록은 木簡이나 文書 형대로 전하며, 사경기록은 墨書寫經과 金石寫經, 또는 印出 형태의 印本寫經으로 그 기록 문화가 전한다. 그 중에서도 <廣開土王陵碑>는 석비로 전하는 기념기록이다. 이 석비의 형식은 자연석에 四面을 거칠게 다듬어 물갈이 하였다. 이런 예는 <忠州高句麗碑(5세기중엽)>·<浦項中城里新羅碑(501년)>·<蔚珍鳳坪里新羅碑(524년)> 등, 주로 三國時代 석비에서 그 例를 볼 수 있다. 蓋石은 없으나 臺石은 비신의 무게에 알맞게 조성하였다.
書體는 당시의 기록문화이다. 고대의 기록문화는 고급문화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 행정 관료들의 어학과 기록문화의 수준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서체는 篆書·隸書·楷書·行書·草書·八分 등의 六體의 書法을 모두 구비한 종합서체의 집성이다. 예서로 쓰여 진 비문에는 팔분을 비롯한 전서와 초서, 행서와 해서의 筆法이 사용되었다. 이는 漢나라에서 사용된 예서와 구별되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 사용된 異體字는 字體의 혼란기에 생성된 자체로써 1500여년 사용되어온 北方의 書寫文化이다. 5세기 초 자체의 혼란기에 조성된 종합서체의 결정판으로 六體集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점에 있다. 그래서 <광개토왕릉비>는 中原의 예서와 달리 모든 서체를 갖춘 종합서체의 집성으로 北方 기념기록의 書寫文化를 선도한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방법과 서법은 百濟와 新羅, 그리고 日本에 전래되어 기념기록인 금석문이 유행하였다. 이런 서법의 예는 당시 주변국의 금석문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문화의 전통은 백제와 신라, 일본에 전해졌다. 신라는 唐의 기록문화를 수용하게 되는 통일 전까지, 일본에서는 아스카시대부터 가마쿠라시대까지 고구려 기록문화의 전통이 이어졌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點法
Ⅲ. 筆劃法
Ⅳ. 結構法
Ⅴ. 章法과 刻法
Ⅵ. 異體
Ⅶ.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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