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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보한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52집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61 - 89 (29page)
DOI
10.18496/kjhr.2015.12.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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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부터 고려 왜구의 연구는 고토 히데호(後藤秀穗)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고려 왜구가 ‘조큐의 난(1221)’이라는 일본의 대혼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최초로 언급한 일본학자이다. 이후 아오야마 고료(靑山公亮)와 모리 가쓰미(森克己)가 고토의 견해를 계승하여 일본 해적이 13세기부터 고려를 침탈하였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패전 이후에도 나카무라 신타로(中村新太郞)가 일본 내 왜구의 근거지가 규슈 연안이며 ‘무사’, ‘어민’ 등이 그 주체세력이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한편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는 ‘왜구’가 고려인의 의식에 분명하게 고정된 시점이 경인년(1350) 이후이며, 이것이 ‘전기왜구’로서 14~15세기의 왜구가 전기왜구라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대해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는 ‘전기왜구’에서 누락된 13세기 왜구를 ‘초발기 왜구’라고 새롭게 규정하였다. 그러나 무라이의 주장도 전시기에 걸친 왜구의 전개과정에서 비추어 보면 전후의 연결성에서 부자유스런 감이 있으므로, 일본사의 시대구분에 맞추어 13세기 왜구를 ‘가마쿠라기 왜구’라고 명명해야 옳을 것 같다.
이후 1350년대에 접어들어 막부의 내홍으로 간노죠란(觀應擾亂, 1350)이 발발하여 규슈에서 재지무사들을 대혼란에 빠뜨렸고, 그 여파가 고려에서는 ‘경인년(1350) 이후 왜구’를 촉발하였다. 이것이 ‘무로마치기 왜구’인데 고려 말, 원 말, 명 초의 시기에 출몰하기 시작하였고, 고려의 남해안과 서해안, 산동반도와 중국 연해로 연결되는 무역로를 따라 동아시아로 확산되어 갔다.
1370년대 규슈탐제로 임명된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의 정치적 야망에 의해 규슈의 혼란은 더욱 가속화되는 경향이었다. 1370년대의 규슈의 극심한 혼란에 따라 재지를 이탈한 세력들이 왜구가 되어 고려에 수백 척의 선박과 수천 명을 이끌고 침입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고려가 나흥유, 안길상 등을 일본에 왜구금지 사신으로 보냈을 때, 일본에서는 승려를 보내와 왜구가 규슈의 ‘백성’과 ‘도망친 무리’라서 왜구 금지가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에 전달해 주었다. 아울러 ‘무로마치기 왜구’의 주체는 일본의 ‘백성’과 ‘도망친 무리’, ‘해상세력’, ‘악당’ 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가마쿠라기 왜구’의 성격과 주체 규명
Ⅲ. ‘무로마치기 왜구’의 고려ㆍ조선ㆍ명 출몰과 주체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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