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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진한 (인천대학교)
저널정보
도시사학회 도시연구 도시연구 : 역사·사회·문화 제12호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55 - 93 (39page)
DOI
10.22345/kjuh.2014.12.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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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개항기 일본 정부가 계획했던 인천 조계지 확장안과 해안매립사업의 경과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인 이주민의 증가에 따른 조계지 확장의 필요성을 절감한 일본 정부는 일찍부터 전관 조계 앞 해안매립사업을 구상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매립사업안은 일본의 세력 확장과 자국 상인의 임대수익 감소를 원치 않은 영국, 독일 등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반대와 방곡령, 을미사변으로 인한 한일 양국의 외교적 마찰 등으로 말미암아 계획 수립 이후 10여년이 지난 1899년에서야 비로소 시행될 수 있었다.
둘째, 매립사업안을 포함해 청일전쟁기 일본 정부가 구상했던 『일본조계확장안』은 러일전쟁과 한일병합 이후 본격화된 인천의 식민지도시 건설과정에서 대부분 시행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인천의 근대도시 형성은 사실상 한일병합 이전부터 일본에 의해 구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나 해안매립사업은 매립지의 독점적, 배타적 활용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 내지 한반도 식민지화의 태동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매립사업은 개항장 일대에서 일본식 시가지의 확장이라는 도시경관변화를 가져온 주된 계기가 되었다. 전관 조계 앞 매립사업 이후 인천에서는 한일병합 이전까지 불과 10여년의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인 유력자의 주도 하에 대여섯 건이 넘는 매립사업이 추진되었다. 일본인 유력자들은 매립지를 불하해 상당한 수익을 남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과의 충돌 없이 마음대로 매립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 다투어 매립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성된 매립지에는 두량장, 창고, 해운회사 같은 항만 관련 시설과 일본인이 운영하는 ‘전기회사, 연초회사, 장유회사, 정미공장’ 등이 들어섰다. 그 결과 일본 전관 조계 북쪽에 위치한 만석정 일대로부터 조계지를 거쳐 인근의 조선인 마을, 인천대신궁으로 이어지는 해안가 일대의 매립지를 따라 일본식 거주지와 근대적 공업시설이 들어섰다.

목차

1. 머리말
2. 일본 조계 앞 해안매립사업 구상과 조선 정부의 동향
3. 청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조계확장안’
4. 일본인 묘지로의 확장과 해안매립사업의 승인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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