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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상기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0집
발행연도
2015.4
수록면
39 - 7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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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가 중에서 홍주의병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로 안창식·안병찬·안병림 3부자와 안항식이 있다. 안창식은 1895년 4월부터 박창로 등 지역의 선비들과 의병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는 1896년 명성황후의 시해 소식을 듣고 민병을 모집하여 장자인 안병찬에게 이들을 인솔, 홍주성으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안창식·안병찬 부자는 관찰사의 변심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안병찬은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다면서 옥중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하였으며, 안창식은 육순의 나이에 곤장을 맞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안병찬은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1906년 3월 의병을 다시 일으키고 민종식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안병찬은 通文을 작성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대는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며, 청양의 합천전투를 치렀다. 그는 합천전투에서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전 관찰사 이남규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안병찬은 석방되어 또 다시 민종식의 의진에 참여하여 참모의 직을 맡아 홍주성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그의 동생인 안병림도 전투에 참전하였다. 안병찬은 안병림과 홍주성을 탈출하여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체포되었다. 풀려난 후에는 박창로 등과 칠갑산 일대에서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그의 숙부인 안항식도 홍주성전투에 참전하여 체포되어 일본의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안항식은 대마도에서 유준근 등 홍주의병과 최익현 등과 함께 유배생활을 하다가 1907년 2월에 풀려났다. 안병찬은 1919년 김복한과 함께 호서지역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일로 체포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이와 같이 안병찬가는 의병 항전에 이어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는 등 항일민족운동을 투쟁적으로 전개한 대표적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1. 머리말
2. 安炳瓚家의 가계와 수학
3. 홍주의병투쟁(1895~1896)
4. 1906년 홍주의병투쟁
5. 安炳瓚의 파리장서운동
6. 맺는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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