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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민영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9집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41 - 85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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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출신의 김영근(1865~1934)은 조선 말기의 저명한 학파였던 화서학파 유생이었다. 그는 김한섭과 김평묵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김한섭은 김평묵, 유중교 등 화서학파 소속 학자들과 교류한 호남지방의 대학자였으며, 김평묵은 이항로(화서)의 수제자로 20여 년간 이 학파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김영근은 이 두 학자를 평생 동안 스승으로 섬겼다.
김영근은 화서학파의 근거지인 중부지방에서 활동하던 화서학파 학자들과 동일한 항일관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항일관은 그가 화서학파의 학문특색인 철학적 원리론에 철저하게 입각해 있었기 때문에 형성될 수 있었다.
김영근은 1905년 망국조약과 다름없던 을사조약 늑결을 계기로 1차 북간도 망명을 시도하였다. 이 조약 체결로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망명을 결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곧 귀국하고 말았다. 그 뒤 1910년 나라가 망하게 되자 2차로 북간도 망명을 결행하였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쳐 시도된 김영근의 북간도 망명은 일제의 국권침탈의 강도 또는 양상에 상응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궤적이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 이러한 망명은 김영근이 유생의 신분에서 일제침략으로 훼손된 민족의 존엄과 역사의 자존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행하였던 것이다.
곧 김영근은 일제 침략과 강점으로 점철된 민족수난기에 가장 선명하고도 강렬한 반일투쟁 노선을 견지했던 화서학파의 성원으로서 시종일관 반일 사상·활동의 지향성을 가지고 일생 고단한 삶을 살았던 학자이며 지사였다. 또한 한반도 중부지방에 활동 및 세력 거점을 지닌 화서학파의 한 분파가 한반도 최남단인 호남 서남부지방에 부식되어 있던 사실과 그들의 활동양상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또 다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목차

1. 머리말
2. 생애와 학통
3. 북간도 망명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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