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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훈식 (인제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92집
발행연도
2014.9
수록면
73 - 10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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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吉再 追崇은 시기에 따라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 변화 가운데 백성 교화와의 연관성에 관해서 살피고자 한다. 15세기까지 길재 추숭은 백성 교화와 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기부터 길재 추숭이 백성 교화라는 문제와 관련을 맺기 시작했으며, 조선후기의 길재 추숭에서 이 내용은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길재를 추숭할 때 烈女 藥哥를 거론하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살필 수 있었다.
세종 때 열녀 약가가 알려졌을 때부터 중종 때까지 약가 이야기와 길재 이야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같은 마을에서 같은 시기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별개로 전해지고 있었다. 17세기 초엽에 갑자기 이 두 사람이 한 이야기 속에 같이 등장하였다. 길재가 백성을 교화한 대표적인 사례로 약가가 거론되었다. 약가의 이야기 속에는 그가 길재로부터 감화를 받았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길재의 행실에 감화를 받아, 혹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 같은 마을에 살던 아낙네가 貞節을 실천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글에서 는 이 이야기를 ‘吉再-藥哥’ 談論이라고 불렀다.
이 ‘길재-약가’ 담론이 성립한 배경에는 지배층의 백성 교화에 대한 관심이 놓여 있었다. 지배층이 백성 교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부터였다. 이런 추세 속에서 길재 추숭에도 백성 교화에 대한 관심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웃에 살던 약가가 길재에게 감화를 받아 守節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길재 이야기와 약가 이야기가 길재의 교화와 약가의 감화라는 내용으로 하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엽에 그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낸 ‘길재-약가’ 담론은 이후 길재 추숭의 기본 내용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17세기 이후 편찬된 私操 史書 속에서 이 ‘길재-약가’ 담론이 계속 재생산되었다. 그 담론 속에서 길재는 이웃 주민들에게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鄕先生’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길재-약가’ 담론은 길재가 ‘충신 길재’ ‘도학자 길재’로서 뿐만 아니라 ‘향선생 길재’로서도 추숭되었음을 알려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烈女 藥哥 이야기
Ⅲ. `吉再-藥哥` 談論의 성립과 그 배경
Ⅳ. `길재-약가`담론의 보급과 확대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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