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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혜련 (숙명여자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57호
발행연도
2014.11
수록면
227 - 259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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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순조∼철종대에 치러진 왕실의 국혼은 안동 김문과 관계되어 있었다. 헌종과 철종의 왕비가 모두 안동 김문 출신으로 헌종비 효현왕후는 김조근, 철종비 철인왕후는 김문근의 딸이었다. 순조대 치러진 순조 공주들의 혼인도 부마를 안동 김문에서 간택하거나, 안동 김문의 외손과 치러졌다.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는 김상용 계열 김한순의 아들 김현근과 혼인하였다. 차녀 복온공주는 김연근의 아들 김병주와 혼인하였다. 삼녀 덕온공주는 윤의선과 혼인했는데, 그는 김이위의 외손이었다.
효현왕후와 철인왕후는 순원왕후의 9촌 조카이며, 수렴청정기에 간택되었다. 이는 순원왕후가 안동 김문이 외척으로 가세를 유지하기를 희망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안동 김문에서는 연이어 국구가 나왔고, 세도정치기라는 특성과 함께 세도가문의 지위를 지속할 수 있었다. 여기에 왕비 간택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순조의 공주들이 안동 김문과 혼인을 맺은 것은 안동 김문이 최고라는 가문의식, 유사시 공주를 매개로 척신들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여기에 본종내로 공주를 출합시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순원왕후의 뜻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 국혼을 맺은 외척, 척신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와 지위를 받게 되었다. 왕비의 부모와 선조들에게는 봉작과 추증이 이루어졌고, 국구는 비변사당상이 되어 정국운영에 참여하였다. 여기에 군문대장으로 군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반면 공주와 가례를 치른 부마가문은 정치적인 대우나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공주에게 주어진 공주방이 부마 가문으로 세습이 되므로 경제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안동 김문은 19세기에 연이어 왕비를 배출하고, 공주와 국혼을 통해 척신의 지위도 확보하였다. 당시 세도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왕비의 배출이었고, 순조, 헌종, 철종의 왕비는 모두 안동 김문 출신이었다. 한 가문에서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한 것은 조선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 안동 김문은 외척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절정은 철종대로, 철종에 의해 순원왕후가 존숭되고, 안동 김문과 그 선대들에 대한 추증과 포상이 이루어졌다. 안동 김문 구성원들이 재상을 차지하고, 비변사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이들은 정국의 실세가 될 수 있었다. 이토록 안동 김문의 가세와 위상이 상승한 데에는 가문 자체의 우수정도 배제할 수 없지만 세도정치기에 외척을 양산해낸 순원왕후의 영향이 컸으며, 국혼을 통해 안동 김문은 그 가세를 재정립 할 수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헌종ㆍ철종의 가례와 왕비 간택
3. 明溫公主ㆍ福溫公主의 嘉禮
4. 안동 김문 가세 재정립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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