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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필규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8집
발행연도
2014.8
수록면
187 - 222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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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는 1940년 7월 조선총독부 직영으로 출범하여 1940년대 이후 만주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한인들을 양성했던 훈련기관이었다. 기존 선만척식회사의 세포훈련소를 모태로 하여 확대·강화시킨 조선총독부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는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이 심화·변질되어 가던 1940년대에 이르러 조선총독부 직영으로 전환되어 전시체제기 인력동원은 물론 재만 ‘집단부락’ 정책의 군사적 강화를 통해 재만한인사회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전략적 기관이었음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총독부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는 한인 분산개척이주자의 효율적인 통제와 이들을 대륙침략정책에 적극 활용하기 위해 만주 현지에 보내질 ‘개척전사’의 양성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개척전사’들을 만주 각지에 배치하여 수많은 집단부락을 설치하고 분산개척이주자들을 집단수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종전의 백만호이주계획이 양적인 측면에서 만주로의 이주를 획책한 것이었다면,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를 통한 계획적인 이주계획은 질적인 변화를 모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만호이주계획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간 상태에서 만주 영유를 위한 이주정책을 계속적으로 수행하고자 했던 일제는 대소전을 대비하여 조선총독부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를 통해 양성된 사상교육을 받은 개척민들, 특히 청년의용대 인원을 국경지대에 배치함으로써 대소전쟁의 ‘방어벽’으로 삼고자 했다. 이들은 실제로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에서 집단부락과 유사한 형태의 수용과정을 통해 훈련받았으며, 군사훈련을 받기도 하는 등 농업실무교육에 국한되었던 종전의 훈련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군사훈련이라는 것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며, 광활한 북만주지역을 영유하기 위한 일제의 야욕에 희생되어야 했던 운명에 놓여있었다. 이들은 전선의 확대에 따라 일제의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만주의 상황과 맞물려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기도 해야 했다.
1938년 당시 재만한인의 수치가 80만에 머물렀으나 1945년 해방 당시 216만을 상회하는 수치였음을 감안할 때 1940년대 한인의 만주로의 이주는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는 우수한 ‘개척전사’들을 양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만주 각지에 수많은 집단부락을 추가적으로 설치하고, 산재한 분산개척이주자들을 이곳에 속박함으로써 만주 이주정책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 속에서 우수한 ‘개척전사’들을 양성하고자 했던 노력이 바로 조선총독부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의 설치와 운영으로 나타났다고 판단된다.

목차

1. 머리말
2.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의 설치배경
3.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의 설치와 운영
4.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의 성격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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