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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인성 (한국교회사연구소)
저널정보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연구 敎會史硏究 第44輯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217 - 24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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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2월,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은 로베르 신부가 비신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고, 경상 감사에 의해 추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베르 신부는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뮈텔 주교는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에게 사건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드 플랑시는 로베르 신부 사건을 1886년에 체결된 조불조약에 크게 위배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사건 관련자인 민정식이 고관인 감사이자, 유력한 민씨 척족의 일원임을 알았고, 사건의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프랑스 정부에 군함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 민종묵과 사건 해결 방안을 협의하였다. 드 플랑시는 조선 정부에 시정 조치를 제시했지만, 민씨 척족이 민정식 징계에 반대함에 따라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처럼 협상이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을 때, 프랑스 군함이 도착하였다. 조선 정부와 프랑스 공사관의 강경한 입장 차, 프랑스 군함의 출현으로 민종묵은 더욱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뮈텔 주교에게 협상 중재를 요청하였다. 뮈텔 주교는 앞으로의 선교 활동을 위해 민종묵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뮈텔 주교의 중재로 드 플랑시는 민정식을 징계하는 대신 견책하는 공문을 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수정했다. 조선 정부가 이 수정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로베르 신부 사건은 해결되었다.
로베르 신부 사건이 프랑스 정부의 종교 보호 정책과 선교회의 선교 활동에 미친 영향은 컸다. 조선 정부는 외국인 학대 사건이 발생할 경우, 관련자뿐만 아니라 관할 지방관도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회람장을 각도의 감사들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지방관은 선교사를 보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 해결 후, 로베르 신부는 대구 읍내에 정착하였는데, 뮈텔 주교는 선교회가 내지 거주권을 획득한 것으로 해석했다. 로베르 신부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 관료들은 뮈텔 주교를 교회의 대표와 대화의 상대로 인정했다. 뮈텔 주교는 이러한 정부 관료의 인식 변화를 활용하여 선교사와 신자들을 보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뮈텔 주교의 선교 정책은 프랑스 공사와의 갈등을 빚기도 했고, 교안이 많이 증가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로베르 신부 사건의 발생
3. 주한 프랑스 공사관의 대응
4. 뮈텔 주교의 중재와 사건의 해결
5. 맺음말 : 로베르 신부 사건의 영향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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