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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張彰恩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4호
발행연도
2012.4
수록면
5 - 50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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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眞興王(540~576)은 553년에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한 후 영역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巡狩를 추진하였다. 진흥왕은 먼저 555년 10월에 北漢山에 巡幸하여 지역 내 민심을 위무하엿다. 556년 7월에는 比列忽州[강원도 안변]을 설치했고, 다음해에는 기존의 新州를 폐지하고 北漢山州를 두었다. 이를 통해 진흥왕은 군사적 거점을 한강 이남에서 이북으로 전진 배치하였다. 진흥왕의 북방 순수는 568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진흥왕은 곧 568년 3월~6월에 북한산 비봉에 올라 비문을 세웠고, 철령[양주-포천-영평-김화-회양-철령] 또는 추가령구조곡[양주-연천-철원-평강-분수령]을 경유한 후 안변을 거쳐 8월에는 황초령 10월에는 마운령까지 巡狩를 갔다. 결국 553~568년 신라의 北進線은 한강 하류 유역의 파주에서 북한산 일대의 전역과 양주를 거쳐 동북쪽으로 추가령구조곡 이남, 그리고 철령을 넘어 안변에서 황초령과 마운령 이남의 함흥 일대에 이르렀다.
진흥왕은 568년에 북한산을 거쳐 함흥 일대까지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 후 곧바로 北漢山州를 폐지하고 南川州[경기도 이천]를 설치했다. 또한 比列忽州를 없애고 達忽州[강원도 고성]를 두었다. 진흥왕이 함흥 일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지역이 가지는 지리적 수세의 불리함 때문이었다. 곧 함흥 일대는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에 이르는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어 고구려의 반경에 쉽게 노출될 수 있었다. 고구려군이 마식령을 넘어 안변을 차지하게 되면 그 이북에 있는 신라군이 고립될 우려가 컸다. 또한 남천주를 설치한 배경은 백제에 대한 방어체제 정비와 연관이 있었다. 곧 567년 들어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는 陵寺를 창건하고 사리장엄 의식을 행함으로써 내부의 결속을 다져 대신라 보복전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나아가 기존에 남조 위주로 추진하던 대중국 외교를 北齊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다변화시켰다. 위덕왕의 이와 같은 행보는 진흥왕으로 하여금 상당한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진흥황이 주치소를 후퇴시킨 후 신라와 고구려의 영역향방은 변화되었다. 다만 그것은 주로 신라 동북방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곧 진흥왕은 예비적인 안정성 차원에서 주치소는 광주산맥이라는 천역적인 방어망 아래의 달홀주[고성]에 둔 채, 비열성[안변]을 최북단 거점성으로 삼아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리고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기존에 설치했던 북한산주의 범위 내에서 신라의 영역지배가 유지되었다. 결국 6세기 중반 신라와 고구려는 한강 하류 유역에서는 북한산주를 기점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고, 동북방으로는 신라가 비열성을 차지한 채 광주산맥 이남을 안정적으로 영역지배 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진흥왕의 北漢山 巡狩
Ⅲ. 진흥왕의 북진 경로와 그 범위
Ⅳ. 진흥왕의 州治所 후퇴와 신라·고구려 간 영역향방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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