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구밀료프(Н. С. Гумилев)의 시학을 연구함에 있어 가장 먼저 접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그의 서정시가 상징주의와 아크메이즘, 두 문학 사조 중 어느 것에 속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상징주의 토대에서 성장하여, 20세기 초반 러시아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킨 아크메이즘의 창시자·리더로서의 구밀료프의 작품을 상징주의와 아크메이즘, 그 어느 관점에서 인식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단순히 구밀료프가 상징주의자인가 아크메이스트인가를 진단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크메이즘의 이론과 실제 사이의 상관관계, 즉 예술사조로서의 아크메이즘의 존폐위기까지 거론될 수 있는 문제이며, 구밀료프의 문학과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틀이 창작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변화, 전개, 진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구밀료프는 1913년 <아폴론> 1호에 게재한 자신의 선언문 「상징주의의 유산과 아크메이즘」을 통해 아크메이즘과 아담이즘 예술관에 대한 강령을 선포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 이전에 발표한 「아담의 꿈」,「예술」,「뱀 굴에서」, 「프라 베아토 안젤리코」등에서도 이미 아크메이즘적 이론과 일치하는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밀료프는 자신의 선언문을 통해 아크메이스트는 상징주의의 경우보다도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지식과 균형 잡힌힘, 그리고 삶에 대한 확고하고 선명한 시각을 갖춰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다른 아크메이스트들과 더불어 구밀료프 또한 초이성적인 신비,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인식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탐구를 거절하고, 유한한 현실 그 자체에서 진리를 찾고자 시도하였다. 선언문 이후에 발표된 아크메이즘에 대한 프로그램적 시라고 할 수 있는 「약강 5보격」은 구밀료프의 아크메이즘 예술관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밀료프가 브류소프에게 보내는 글에서 ‘실제로 아크메이즘적인 시’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에는 아크메이즘 경향과 더불어 초기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구밀료프의 상징주의적 요소들도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강 5보격」에 나타난 상징과 상징주의적 요소들은 종교와 관련된 안개 낀 혼돈의 상징과 ‘저 세계’에 존재하는 인식 불가능의 영역이 아닌, 시야가 명확히 확보된 보다 실제적이고 서사적인 메타포라 할 수 있다. 1910년대 이후, 「상징주의의 유산과 아크메이즘」이 발행될 즈음에 출판된 『낯선 하늘』과 『화살통』에는 버리고 떠나지 못한 혹은 소유하여만 하는 ‘상징주의적 유산’들과 ‘아크메이즘’적 요소들이 혼재하고 있다. 일부 비평가들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낯선 하늘』에 포함된 모든 작품들이 갑작스럽게 상징주의에서 아크메이즘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집 『낯선 하늘』이 이러한 상징주의와 아크메이즘을 함께 아우르며, 구밀료프 창작의 시기를 구분 짓게 하는 과도기적 단계의 작품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구밀료프는 상징주의에서 아크메이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부단히 기존 자신의 작품 속에 존재하고 있던 상징주의적 요소들과의 투쟁을 지속하였으며, 그러한 결과 선언문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아크메이즘적 이상들이 시속에서 발현되어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Данная работа посвящена изучению наследия символизма и акмеизма в стихотворениях Н.С.Гумилева『Чужое небо』 и 『Колчан』. Один из самых популярных и часто встречающих вопросов: “к какому литературному направлению принадлежат стихи Н.С.Гумилева, символизму или акмеизму?”. Одни критики и современники Гумилева называют процесс развития его литературного направления “от символзма к символизму”, а другие “от преодоления символизма к преодолению акмеизма”. Поэтому очень важноисследовать именно те стихи, которые опубликованы около 1910-ого года, когда был опубликован манифест Гумилева <Наследие символизма и акмеизм>. В стихотворениях 「Сон Адама」, 「Искусство」, 「Из логова змиева」, 「Фра Беато Анджелико」 мы сможем найти акместические практики, которые совпадают с принципом акмеизма. Гумилев требовал от поэтов большое равновесие сил и более точное знание отношений между субъектом и объектом, чем то было в символзиме. После опубликования 「Искусства」 Ю.И.Айхенвальд сказал, что изысканный и искусный переводчик Теофиля Готье следует завету своего французского собрата 《чеканить, гнуть, бороться》. В марте 1913-ом года Гумилев писал В.Я.Брюсову, что в №3 《Аполлона》, который выйдет на этой неделе, действительно будут настоящие акмеистические стихи. Речь идет о стихотворение 「Пятистопные ямбы」. В нем мы действительно можем найти и почувствовать определенно акмеистические мотивы, с их прозрачными, яркими и мужественными взглядами на земной мир. Но, как Гумилев сказал в своем манифесте, быть акмеистом труднее, чем символистом, как труднее построить собор, чем башню: даже в этом стихотворение мы можем найти смутные, ночные и религиозные аспекты, которые используют символисты. Поэтому хотя иногда акмеизм и называют пост-символизмом, но, на самом деле, акмеизм в России существует как направление литературы и искусства. И это новое направление помогло молодым начинающим поэтам в оформить свое понимание мира и искусств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