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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영진 (델리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인도학회 인도연구 인도연구 제19권 제1호
발행연도
2014.5
수록면
1 - 3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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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에서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약 12 퍼센트를 차지하며, 순니 무슬림의 수는 시아 무슬림의 3배에서 4배 정도가 될거라고 추정된다. 델리의 무슬림은 무하람의 열 번째 날, 즉 아슈라에 대규모 거리행진을 행하는데, 순니파와 시아파는 이 날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며 그것을 기념하는 방식에서도 크게 차이를 보인다.
먼저, 순니파는 아슈라를 모세가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승리를 얻은 기쁜 날로 정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니 무슬림들은 아슈라에 따지아 행진을 행한다. 따지아란 이맘 후세인의 묘당을 상징하는 구조물로서, 따지아를 빈터로 운반한 뒤 땅 속에 묻는 아슈라의 의식은 일종의 모의장례식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시아파는 아슈라를 후세인이 까르발라 전투에서 순교한 슬픈 날로서 기억한다. 시아파는 후세인의 죽음을 두 달 넘게 추모하는데 이 기간 중에 두 번의 따지아 행진을 개최한다.
오늘날 델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러한 따지아 행진들은 역사적 변화들이 반영된 결과들이다. 후마윤이 시아파의 무슬림왕조였던 사파비드에서의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1555년 델리로 돌아올 당시 많은 시아 무슬림들이 그를 따라왔다. 이들시아 무슬림들은 이라크의 까르발라까지 매년 순례를 떠날 수 없었으므로 대신 따지아를 만들어 아슈라를 기념했다. 무갈제국 시대에 따지아 행진은 순니파는 물론 힌두교도까지 참여할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영국식민지 시대에 정부의 새로운 정책들로 인하여 시아파는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시아파는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서 후세인의 비극적 죽음을 강조하는 마땀, 줄제나 등이 아자다리에서 부각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시아파와 순니파가 각기 별도의 따지아 행진을 개최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따지아 행진들은 과거로부터 그대로 전수받은 전통이 아니다. 시아파는 따지아란 독창적 구조물을 창안하였고, 순니파의 따지아 행진은 그것을 행하는 분위기가 밝고 흥겹다는 점에서 시아파의 따지아 행진과 구별된다. 즉 인도의 따지아 행진들은 창조적 모방을 통해 시대에 적응하는 전통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목차

국문요약
I. 머리말
II. 델리의 무슬림
III. 델리에서 행해지는 따지아 행진들
IV. 따지아 행진의 성격과 내용의 변화
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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