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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철웅 (단국대)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08호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71 - 10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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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觀은 唐이후에 ‘宮’?‘觀’으로 불렀고 그 중 규모가 큰 것을 宮이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道宇, 道觀, 道殿등으로 불렸는데, 道觀이외에 堂, 色, 都監등의 명칭이 붙은 다양한 도교 관련 기구가 있었다. 구요당, 복원궁, 정사색 등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나머지 도교 관련 기구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검토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고려의 도교 관련 기구 중에서 ‘殿’, ‘色’, ‘所’의 명칭이 붙어 있는 神格殿, 昭格殿, 淨事色, 燒錢色, 淸溪拜星所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신격전은 그 설립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종 42년(1255)에 처음으로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무신집권기에 작성된 이규보의 초례문, 원 간섭기에 작성된 정포의 초례문을 통해 고려후기까지 도관으로 존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 태조 1년(1392) 11월에 고려의 道觀을 정리할 때에 신격전을 폐지하였으니 신격전의 존폐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소격전은 고려시대 자료에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으나 조선 개국 초에 고려의 도관을 정리하면서 개경의 소격전을 남겨두어 조선 도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리고 한양 천도 이후에는 한양에 소격전을 설치했다. 그런데 개성으로 다시 천도한 후인 태종 2년에 정사색 터에 소격전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이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는 소격전이다. 소격전의 규모는『세종실록』에 直宿殿, 十一曜殿이, 『용재총화』에서 太一殿, 三淸殿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도교 전각이 늘어나자 세조는 소격전을 소격서로 개칭하고 소격서로 하여금 이들 道殿을 통괄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정사색은 강화 천도 시기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종 45년에 그 기능이 강화되었고, 충선왕 때 잠시 재초도감이라 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정사색으로 환원되어 고려말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조 원년에 고려의 도교 기구를 정비할 때 폐지되었다. 태종 2년(1402)에 소격전을 정사색의 옛터에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開城府의 龜山寺는 송악산 소격전 동쪽 옆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사색은 궁궐 북쪽의 송악산 남쪽 자락에 있었고, 인근에 귀산사와 왕륜사가 있었다. 소전색은 그 연원이 충렬왕 4년(1278)까지 올라간다. 소전색에 대한 충렬왕 4년의 기록, 그리고 ‘소전’ 명문의 청자 제기 등을 통해 볼 때 소전색은 원 간섭기 이후부터 조선 태조 1년까지 존속한 도교 기구이자 도관
이었다. 청계배성소는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며, 조선 태조 1년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淸溪壇이 정식 명칭인 듯하고 祭星壇으로도 불렸다. 청계배성소, 청계단이라 부른 것은 송악산 자락의 淸溪寺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神格殿, 昭格殿, 淨事色, 燒錢色, 淸溪拜星所등의 도교 건물 및 제단은 모두 고려 후기에 건립되었다. 이처럼 복원궁 건립 이후에 도교 기구와 건물이 늘어난 것은 고려시대에 도교가 융성하였고, 초례가 매우 성행했음을 말해준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神格殿과 昭格殿의 존폐
Ⅱ. 淨事色과 燒錢色의 존폐
Ⅲ. 淸溪拜星所의 존폐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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