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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옥희 (부경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89집
발행연도
2013.12
수록면
301 - 337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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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日本書紀』‘宣化元年詔’에 보이는 那津官家를 과연 대재부의 기원으로 볼 수 있는지를, 나진관가의 형성 배경으로 할 수 있는 4∼6세기의 시대상황 속에서 살펴보았다.
선화 원년의 조는 큐슈지역의 여러 屯倉의 곡물을 모아서 나진관가를 세우도록 명령한 것이다. 官家를 설명하는 앞부분은 흉년에 대비하여 修造를 명한 내용인데, 이 관가가 반드시 한반도 방면에 대한 군사적 기능의 기지였다고 생각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또한 선행연구의 지적대로 일정한 허구성을 담고 있으며,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전승과 연관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로 대외적 위기감이 고조된 야마토정권이 정치적ㆍ군사적 요충지로서 큐슈 북부가 중요해짐에 따라 那津官家를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멀리 떨어진 畿內뿐만 아니라 큐슈의 각 지역으로부터 곡물을 옮겨 많은 식량을 那津之口에 모으게 한 것은, 磐井의 난과 같은 제2, 제3의 반란에 대비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열도의 내부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려는 대내적 군사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본 고대 최대의 戰亂인 筑紫君磐井의 난을 거치면서 이전에 그의 세력권이었던 곳에 각각 屯倉을 설치(安閑元年, 534)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군사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磐井세력을 진압한 직후에 설치된 糟屋屯倉을 磐井의 구 세력권에 설치하고 이어서 那津官家가 설치함으로써, 야마토정권이 북 큐슈 지역의 지배를 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이는 후대에 나타나는 대재부의 군사적 기능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반도에서 백제의 남하와 신라의 남진으로 인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왜가 이러한 상황에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또한 외국 사절을 응대하기 위하여 식량과 물자를 비축하였을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나진관가 설치의 대외적인 계기로 볼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각각 영산강 유역과 가야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면서, 왜는 대외적으로도 북부 구주에 군사적인 거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반정의 난이 신라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또한 5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한 ‘倭五王’ 시대에 雄略의 南朝사신 파견기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국 南朝까지 외교관계가 전개되었던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6세기 중반 무렵이 고대 일본의 중앙과 지방이라고 하는 지배관계가 國造制등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고정되는 시기라고 볼 때 那津官家가 설치되는 무렵이 바로 그러한 시대와 맞물리는 때라고 할 수 있고, 축자 지역에 대한 군사적인 통제의 필요성도 증대되었던 때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宣化원년(536)에 축자의 那津포구에 官家를 修造하고 대외적 기능도 수행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那津官家는 야마토 정권의 九州지배 강화와 대외 교섭에서 매우 중요한 기구였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한 성격이 대재부와 대부분 일치하고 있는 점에서 磐井의 난 이후 성립된 나진관가를 대재부의 기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大宰府 연구사와 문제제기
Ⅲ. 3∼4세기의 那津
Ⅳ. 磐井의 亂
Ⅴ. 那津官家의 成立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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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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