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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정신문화연구 2013 가을호 제36권 제3호 (통권 132호)
발행연도
2013.9
수록면
251 - 286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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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연구 대상으로 한 〈황강연조도〉는 규장각 소장 〈의순관영조도〉 이래 명사 영접을 기록한 희귀본이다.〈황강연조도〉는 명나라에서 1634년(인조 12) 사례감 태감 노유녕(1590?미상)을 칙사로 임명하여 소현세자의 책봉 고명과 면복 및 채단을 보냈던 배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황강연조도〉는 황주에서 명사 일행을 영접하였던 원접사와 종사관을 비롯해 관반으로 동원된 황해관찰사 오숙 이하 황해도 지역 지방관 명단이 좌목에 상세히 적혀 있어 그림의 제작 배경을 추정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황강연조도〉가 그려진 1634년을 전후한 시대적 배경은 명과 후금이 주도권 다툼을 하던 명청교체기로, 조선과 중국 간에 긴박한 대외 관계가 전개되던 때이다. 1634년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태감 노유녕은 조선의 영접 의주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인정물품을 무리하게 요구하여 정묘호란 이후 황폐한 조선의 경제 상황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 글에서는 도경유의 문집 『낙음집』을 통해 성주도씨 종중에서 소장해온 〈황강연조도〉의 제작 경위를 파악하여 현존 작품에 대한 양식적 선후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 현재 성주도씨 종중이 소유한 〈황강연조도〉필사본 2점은 당시 관반으로 참여한 봉산군수 도경유가 소장한 작품과 관련이 있다. 그중 계회축 형식 1점과 『낙음집』 내에 삽입된 〈황강연조도〉 목판은 성주도씨 종중에 의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고, 그림 부분만 있는 1점이 도경유를 제향하는 대구 병암서원에 소장되었다. 양식적으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계회도 형식을 갖춘 작품이 병암서원 소장 그림보다 17세기 화풍을 비교적 잘 반영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6년 목판으로 판각한 〈황강연조도〉가 제작되어 『낙음집』의 삽도로 인출되었다. 한편 광주에서 구장되었던 작품은 19세기 민화풍을 반영하여 모사되었으나, 당시 황주에서 관반으로 참여하였던 인물들의 좌목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작품으로 주목하였다.
대부분의 가전 기록화가 그렇듯 현존하는 〈황강연조도〉는 도경유가 소유했던 원본을 지속적으로 후대에 전승하고 보전하기 위해 두 차례 이상 모사하였으며, 도본을『낙음집』에 함께 남기기 위해 1906년에 목판본으로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성주도씨 종중의 조상 숭모의 의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1634년 그려진〈황강연조도〉의 원본을 유추할 수 있는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이들 작품은 가문의 기록을 넘어 명청교체기 해로를 통해 조선에 온 명사를 황주에서 영접하는 장면과 명사 및 원접사 일행의 행렬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여 규장각 소장 〈의순관영조도〉이래 조선과 명의 대외관계 일면을 보여주는 희귀한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명청교체기 명 사신의 조선 출래
Ⅲ. 1634년 명 사신 영접
Ⅳ.〈황강연조도〉의 제작 경위
Ⅴ.〈황강연조도〉의 주요 내용과 특징
Ⅵ.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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