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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성주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5집
발행연도
2013.8
수록면
105 - 139 (35page)
DOI
10.18496/kjhr.2013.08.4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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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대(1467년) 朝鮮과 明의 建州女眞협공은 양국 간 이루어진 최초의 공동 작전이었다. 특히 조선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女眞을 정벌하였지만, 명은 최초의 여진 정벌이었다. 조선은 명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독자적인 建州衛정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서 실행할 수 없었다.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자마자 병력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었는데, 마침 명으로부터 건주위를 함께 정벌하자는 요청이 있게 되었다.
명의 건주의 정벌은 명의 조공 제한으로 비롯되었다고 연구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이에 더해 명의 조공 제한이 통교위반자인 ‘僞使’를 발생시켰고, ‘위사’로 인해 정상적인 통교가 방해된 사람들[眞使]이 변경을 침범하게 된 상황을 고찰해 보았다. 1467년 명의 건주위 정벌 배경에는 이러한 측면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被虜人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군세를 감안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조선군이 建州本衛의 수장 李滿住李古納哈李豆里등을 죽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정벌 루트가 婆猪江과 兀彌府2개로 단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주본위의 수장 이만주의 거주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효과적인 전과를 올렸음을 보여준다.
한편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은 여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죽거나 사로잡힌 총 1,200여 명(참살 924명, 포로 276명)은 당시 建州三衛인구의 약 5~1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산채 가옥 농경지가 불타거나 파괴되고 牛馬가 죽거나 약탈된 것뿐만 아니라 노동력으로 쓰인 피로인 1,172명을 빼앗기면서 경제적 타격도 심각하였다.
이후 명은 건주인들의 보복 침입에 대비하여 遼東邊牆의 동단부분을 쌓기 시작하였고, 여진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벌 후 2~3년 뒤에는 건주삼위를 부활시켰으며, 전통적인 조공체제를 재개하였다. 조선도 평안도를 中道西道東道로 나누어 방어하게 하는 한편 명과 건주삼위의 관계가 부활됨에 따라 그들과의 관계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명의 조공제한 및 교역소 설치라는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미 농경화가 진행된 여진 사회의 발전과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결국 건주삼위의 요동 침입은 다시 격화되었으며,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여진 협공의 기억과 성공은 12년 만인 1479년에 또다시 재현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조선의 독자적 정벌 계획
3. 명의 협공 요청과 조선의 출병
4. 여진 협공의 결과와 영향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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