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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민규 (간송미술관)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74號
발행연도
2012.6
수록면
55 - 81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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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明燈은 불교에서 유래한 燃燈具로서 고려말부터 陵墓에 건립되기 시작해서 조선시대 陵墓石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 왕릉의 장명등은 幽冥世界를 밝힌다는 상징적인 의미와 下玄宮(下棺) 후 小祥 때 까지 약 200여일 동안 山隆祭禮시 燃燈하는 실제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조선은 국왕들의 깊은 관심으로 왕릉 조영 보고서인 山陵都監儀軌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 啓辭와 大浮石所儀軌에는 왕릉의 석물 수량과 크기는 국왕에 의해 결정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석물의 수량과 크기는 『國朝五禮儀』와 『國朝喪禮補編』이 조선 전ㆍ후기의 기준이 되지만 특정한 왕릉을 선택해 따르게 하는 경우도 있으며, 太祖 健元陵과 定宗 厚陵이 대표적이다.
山陵都監儀軌은 석물의 수량이나 크기뿐만 아니라 石物을 再使用하거나 簡素化하는 과정 등 조선인의 石物觀을 짐작할 수 있다. 石物 再使用은 1674년 顯宗 崇陵에 옛 孝宗 寧陵(1759년) 석물을 다시 사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肅宗은 이 석물 재사용과 尤庵 宋時烈의 사상을 받아들여 석물의 크기를 대규모 축소하는 석물 간소화를 시행한다. 이런 석물 재사용이나 간소화는 비용을 절감하고 노역을 줄여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조선 왕릉 장명등의 양식흐름은 1기(1392-1506)에 蓋石과 體石이라는 조선 장명등의 단순한 체제가 완성되고, 이후 왕릉 석물의 기준이 되는 『國朝五禮儀』가 완성되어 그 안에 장명등의 체제와 구조가 명시된다. 2기(1506-1567)는 成宗 宣陵과 『國朝五禮儀』가 기준이 되어 좌우 폭이 좁은 세장한 장명등이 제작된다. 3기(1567-1674)는 太祖 健元陵의 체제를 따라 왕릉 석물을 조성해 크기가 줄어들게 된다. 또 상대ㆍ하대에 안상과 모란, 연꽃 등이 조각되고 입체적인 공포가 개석 하단에 조각되는 등 다양한 조형 실험이 이루어진다. 4기(1674-1724)에는 조선 왕릉 석물 중 가장 규모가 작은 定宗 厚陵을 기준으로 肅宗이 왕릉 석물간소화를 단행해 석물의 크기가 줄어듦과 동시에 평면형태가 4각으로 변하고, 하대의 형태가 如意頭形 雲足으로 표현된다. 5기(1724-1864)는 조선 후기 4각 장명등이 완성되는 시기로 蓋石이 장식적으로 마루부분이 강조되고, 상대의 모란문은 도안의 구성이나 조각수준이 매우 높고, 하대는 가구의 다리형태로 바뀌어 역대 석등들과는 전혀 다른 조선의 장명등이 완성된다.
500년간 지속적으로 제작된 왕릉 장명등은 사대부묘 장명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진행될 사대부묘 석물 연구를 비롯해 궁궐의 석조물, 나아가 불교 석조문화재의 기준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長明燈의 의미와 燃燈
Ⅲ. 『山陵都監儀軌』의 長明燈
Ⅳ. 朝鮮 王陵 長明燈 樣式 變化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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