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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崔鈆植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39號
발행연도
2013.6
수록면
67 - 90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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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국사 천희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武臣으로 충혜왕대에 요직을 맡았던 裴佺의 형제라는 견해도 있지만 塔碑와 관련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그는 경상도 興海 지역의 향리 집안 출신으로 파악된다. 그는 13세에 당시 화엄종의 주요 사찰이었던 高靈 盤龍社에서 社主 一非大師의 문하에 출가하였고, 19세에 僧科의 上上品에 합격하였다. 이후 여러 사찰의 주지를 맡으며 화엄종의 주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는 화엄종 승려이지만 당시 불교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看話禪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8세 되던 1364년에는 본격적으로 看話禪師로서 인정받기 위하여 중국 강남지방에 유학하였다. 그의 중국 유학에는 같은 화엄종 출신으로 정권을 장악한 辛旽의 지원과 당시 강남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張士誠 세력과 교류하려는 고려 정부의 의도가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유학 1년 만에 이미 입적한 蒙山德異와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萬峯時蔚로부터 印可를 얻고 돌아온 뒤에는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였다. 1365년 국사로 책봉된 뒤 1371년 신돈이 실각할 때까지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1371년 7월 신돈의 실각 이후 국사의 자리에서 물러난 천희는 고려 화엄종의 종찰인 浮石寺 주지를 맡아 사찰의 중창을 추진하였다. 화엄종 출신의 국사로서 화엄종의 전통을 회복하려한 시도로 생각된다. 부석사 중창을 마친 천희는 1386년에 수원 광교산의 彰聖寺에서 입적하였다. 이곳은 그의 입적 직전에 그와 문도들의 거점 사찰로 마련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입적 후 국사의 塔碑가 건립된 주요 사찰로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발전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천희는 관음신앙과 간화선을 중시하였다. 그의 관음신앙은 관음보살의 眞身을 친견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義相의 관음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며, 말년의 부석사 중창도 의상의 전통을 회복하려한 시도로 해석된다. 천희는 또한 교학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看話禪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다수의 선종 승려들과도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의 간화선 수용은 당시 유행하는 새로운 불교 사상에 대한 적극적 대응인 동시에 이론 탐구보다 실천 수행을 중시하는 의상계 화엄종의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의상계 화엄사상의 전통과 새롭게 전해진 간화선을 함께 아우르려한 그의 모습은 고려 불교계에서 발견되는 禪敎會通의 시도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眞覺國師 塔碑의 검토
Ⅲ. 眞覺國師의 생애
Ⅳ. 眞覺國師의 思想
Ⅴ. 맺음말
【Abstract】

참고문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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