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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무진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48집
발행연도
2012.9
수록면
215 - 259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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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공론의 정치 운영이 당쟁으로 번지고 있었고 각각의 정치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성리철학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지만 그 가치관에 따른 사회적 질서의 재편은 진행 중이었다. 정구의 관심에서 바라보면 예禮가 모든 관계의 기준으로 제시는 되었으나 전면적인 실천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이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학문적 성취에 관심이 많았다. 그 자신 예학에 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며, 예학의 전문가로서 편지 등을 통하여 여러 사람에게 자문하였다. 그는 예가 모든 관계의 기준이 되고 온 사회가 예를 알고 예를 지키기를 바랐다.
그는 관직생활과 귀향을 반복 하였는데 1차시기는 주로 지방관으로 활동하였던 시기이었다. 창녕, 동복, 함안 등 여러 곳의 지방을 다스리면서 보다 더 현실에 대한 이해를 넓게 한 시기이었다. 2차시기는 조정 관료로 활동하면서 1차시기보다는 규모가 큰 부?목을 다스렸다. 목민관으로서 경험한 지방의 현실은 다양하였고 그 일부는 전쟁의 와중이었다. 그는 일반적인 수령의 7사 범주 가운데 무엇보다도 교육과 교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향촌사회에서의 활동은 관직에 나아가기 전과 광해군 때에 완전히 낙향한 후를 제외하면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서원과 정사를 설립하고, 각종의 계회를 조직하고, 종회에 참석하였으며 지속적인 저술활동을 하였다. 문제가 있는 현실은 변통이 가능한 현실이었다. 군주 혹은 수령, 양반층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기준을 세우고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또한 다스리는 대상인 백성들이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공통의 가치관을 확인하고 공동의 일들을 찾아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기준이 곧 예이었다. 예를 기준으로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친족이라는 혈연 범위를 넘어서서 함께 사는 향촌사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예치론이었다. 정구의 안민은 경제적인 안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기본 가치로 삼고 예를 지키는 안민이었다. 정구가 생각하는 경세의 도구는 예이며 경세하여 이룰 세상 역시 예의 사회이었다.

목차

Ⅰ. 서언
Ⅱ. 관직생활과 향촌사회에서의 활동
Ⅲ. 현실인식과 경세론의 구조
Ⅳ. 결어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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