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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현미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49집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97 - 142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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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화단은 일제 강점기라는 제한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민족정신이 투철한 지역 최고의 지성인들에 의해 전개되어 신미술이 꽃을 피운 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식민시대의 거점도시로 새롭게 부상한 대구에서 조선의 예술가들은 대구에 상주하게 된 일본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활발한 문화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대구가 문화예술의 도시로 부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대구화단은 일찍이 예술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여 전통화단과 신미술이 갈등 양상 없이 수용되고 있었다. 그 중 문인화는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63)의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서병오는 전통문인 즉, 성숙한 인문학자로써 학문과 더불어 시서화의 일가견을 갖추어 영남화맥의 기조를 마련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남 문인화는 호남 화맥과 양대 주류를 이루며 발전하게 되어 당시 서울화단과 견주어 대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당시 서병오의 주목할 제자인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1876-1934)은 11년간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장기간의 옥중생활로 서화가로써의 삶을 이어가지 못했고, 운강雲岡 배효원裵孝源(1898-1942)은 조선미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나 1942년에 요절하였다. 그리하여 서병오 이후 6,70년대 영남서화계의 중심인물은 죽농竹? 서동균徐東均(1902-1978)에 의해 발전하게 된다.
서병오 이후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서동균은 서예와 문인화 전반에 걸쳐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였고 특히 묵죽화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서병오가 가장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시기는 1920년대로 문화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기로 일제시대의 고단함이 생활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전반의 움직임과 변화에 의해 서병오는 전통문화에 대한 애호가 작품에 깊이 배여 있어 중국신문인화의 수용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전통의 수묵문화의 계승이라는 범주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반면 서동균의 전성기인 1950,70년대에는 해방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삶의 에너지가 솟구치는 시대였다. 죽농은 서양화, 수채화의 활발한 전개가 이루어진 대구화단의 새로운 물결속에서 문인화를 더 이상 옛 문인들의 정신적인 산물이 아닌 회화의 소재로 인식하여 문인화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하게된다. 그리하여 묵죽의 전범典範인 사실성이 부각된 조선시대 묵죽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회화적인 요소를 화폭에 전개시켜 현대로 이행되는 문인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60,70년대의 대구화단의 변화의 에너지를 문인화의 영역으로 표출하게 된다.
그리하여 서예를 겸비한 문인화가의 전통적인 면모를 갖추면서 현대로 이행되는 문인화의 변모를 끊임없이 전념한 서동균을 통해 영남문인화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근대 서화계의 동향과 대구화단의 성립
3. 서동균의 생애와 예술활동
4. 서동균의 서화 작품 분석
5.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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