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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중희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44집
발행연도
2011.9
수록면
375 - 423 (5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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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에 영남의 중심지 대구는 문화예술 면에서 특별한 지역이었다. 사회운동에서, 문학계에서, 미술계에서, 사진계에서 공통으로 관통하는 놀랄만한 정신적 광맥이 존재한다. 다름 아니라 ‘민족정신의 발양’이다. 당시는 이들 각 영역이 오늘날처럼 분리 독립되지 않은 융합된 상태에서, 의식 있는 지역의 선각자들이 상통하면서 하나로 결속 된 이념의 도가니로 묶을 수 있었다.
1907년을 중심으로 한 근대초엽의 서상돈?김광제를 비롯한 국채보상의 사회운동, 백기만?이상화?현진건을 비롯한 문학계, 서병오를 종주로 한 사군자화의 지속과 김용준?이인성?이쾌대를 비롯한 초창기 서양화단, 구왕삼을 중심으로 한 사진계, 이들 문화예술 전체분야에 걸쳐 그 속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성이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시인 이상화?이상화의 백부 이일우?친형 이상정?화가 서병오?미술이론가 김용준?화가 이쾌대의 친형 이명건 등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대구의 문화예술계의 선각자들로서 하나같이 배일排日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상화는 원래 민족주의자 집안 출신으로, 특히 백부 이일우는 철저한 배일 민족주의자로 국채보상운동과 교육사업을 펼쳤다. 친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민족미술 수립을 목표로 한 김용준이 주도하여 1930년에 ‘향토회’를 조직한다. 지금까지는 이 ‘향토회’ 결성이 단지 일본인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오인되고 있었다. 역시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면서 화가인 이명건(李名建, 호 如星)은 화가인 동생 이쾌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쾌대는 민족미술수립에 심취하여 당시 헐벗고 굶주린 민중의 군상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여기에 초창기 한국사진계의 중심지였던 대구에서, 구왕삼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피사체를 선정하여 작품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그가 단순히 리얼리즘 작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이렇게 보면 초창기 대구의 문화예술계가 ‘민족주의 정신의 발현’ 이라는 하나의 강고한 덩어리로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대구는 곧 ‘민족정신의 본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민족정신 구현의 발단이 된 국채보상운동
3. 대구는 한국근대 민족문학의 산실
4. 민족주의자들의 후원에 의한 근대 대구화단의 성립
5. 대구 사진계와 구왕삼의 민족혼 표현
6.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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