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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황선익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431 - 461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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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무렵 사할린지역에는 4만여 명의 한인이 있었으나, 이들의 귀환문제는 미국을 대표하는 연합군총사령부(GHQ/SCAP)와 소련의 교섭에 향방이 결정되었다. 대일점령을 우선순위에 둔 미국은 일본-중국-소련지역 귀환을 순차적으로 진행해갔다. 사할린지역 귀환교섭은 태평양전쟁기부터 이어진 미소협상의 미묘한 협력·견제구도 틀에서 진행되었다.
1946년 4월 23일 연합군총사령부는 소련당국에 일본과 북한간의 상호 귀환을 공식 제안하였다. 이에 대한 후속회의가 이어지고, 1946년 12월 19일 ‘소련지역에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협정’("Repatriation of Japanese Nationals from Soviet and Soviet Controlled Territories, and of Koreans from japan to Korea North of 38°North Latitude")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대부분의 일본인이 순차적으로 귀환했지만, 한인의 귀환은 배제되었다. 미국 측은 ‘소련지구 미소협정’에 따라 소련지역 한인의 귀환에 대해 몇가지 기본조건을 전제로 했다. 먼저 귀환의 대상이 전쟁포로여야 하며, 일본 국적을 가진 자에 한하며, 지역적으로는 일본과 소련점령지간의 이동만을 범주로 한 것이다. 한편 한인을 전후복구의 수단으로 여긴 소련 측은 사할린 지역 한인과 북한, 일본 지역 한인의 맞교환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련 측의 요구에 미국 측은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주한미군정은 한인의 귀환을 부담스러워 하며 부정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1948년 5월부터 일본군 포로와 함께 시베리아 등지에 수용되었던 한인포로들의 송환이 시작되었다. 이들에 의해 소련 등지에 억류된 한인의 참상이 국내에 구체적으로 전해졌고, 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국내 여론이 비등해졌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한인 귀환운동은 국회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어졌다. 국회는 사할린 및 쿠릴열도 억류 한인 구출을 위한 청원을 정부에 제기했다. 한국 정부는 주일대표부를 통해 연합군총사령부에 사할린 한인 귀환을 요청했다. 연합군총사령부는 한국이 소련의 승인을 받지 못한 만큼 다른 중재자를 찾아보라며 사실상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소련지역 내 한인 귀환은 냉전의 제약으로 계속 표류를 거듭했다.

목차

1. 머리말
2. 미국의 해외 한인문제 인식과 미소 협상구도
3. 소련군의 사할린점령과 한인의 방치
4. 사할린 한인 귀환교섭과정
5. 사할린 한인의 억류와 국내 귀환운동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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