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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바다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40호
발행연도
2012.11
수록면
123 - 160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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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제법 체계가 관철되기 이전, 동아시아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국시대 이래 오랫동안 중국과 朝貢冊封을 매개로 관계를 맺어왔다. 대대로 중국에서는 이 관계를 규정하는 ‘禮制’를 반포하였으며 한국도 이를 수용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모색해 나갔다. 결국 한국에서 성리학적 화이론에 입각한 조선왕조가 성립되면서 이 관계는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은 1392년 건국 이래 조선 나름대로의 예제를 지속적으로 정비하여 마침내 1474년 『國朝五禮儀』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던 明에 대한 事大 의례는 대표적으로 望闕禮, 迎詔勅 儀禮를 들 수 있는데, 이 의례들은 모두 嘉禮에 편성되었다. 특히 明의 사신과 조칙을 맞이하는 迎詔勅 儀禮는 통상 중국에서는 賓禮로 취급하였는데 조선에서는 嘉禮로 정립하였다. 이는 조선이 明을 단순한 외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조선 스스로 明 중심의 중화적 질서체제 내에 수용되고자 하였던 것을 뜻한다.
그러나 조선은 迎詔勅 儀禮를 다룬 儀註를 통하여 明 중심의 질서를 수용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국왕 및 왕조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詔書에 관한 의례와 勅書에 관한 의례를 분리하여 詔書에 대해서는 明에서 규정한 예제, 즉 『明集禮』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勅書에 대해서는 그 절차를 훨씬 간소하게 꾸렸다. 고압적인 배례 중의 하나였던 叩頭도 1회에 그쳤다. 『高麗史』 禮志 단계에서는 叩頭가 3회 있었는데 이를 줄여 국왕의 대내적 위신을 최대한 높이려 한 것이다.
明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 같은 조선의 자구 노력은 事大 義理를 거스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國朝五禮儀』 성립을 전후로 조선에 온 明 사진들은 종종 조선의 迎詔勅 의식이 明禮를 따르지 않은 점을 지적하였다. 심지어 明 이전 遼, 金, 元 등 정복 왕조나 사용하던 五拜三叩頭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결국 五拜三叩頭를 사용하지 않고 『國朝五禮儀』 완성을 통하여 독자적인 迎詔勅 관련 의주를 마련하였다. 이는 즉, 전근대 韓中 관계가 비록 조공책봉체제로 묶여 있었을지라도, 사대 관계의 내용은 언제나 달라질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迎詔勅’ 관련 儀註의 형성과 변천
3. 『世宗實錄』 五禮의 성립과 ‘迎詔勅’ 관련 儀註의 정비
4. 『國朝五禮儀』 성립 전후 ‘迎詔勅’ 관련 儀註의 정비와 五拜三叩頭 논쟁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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