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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창호 (인하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40호
발행연도
2012.11
수록면
37 - 7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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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일본 와세다大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光武五年一月日通津郡庚子戶籍表』(이하, ‘통진호적’)를 분석한 글이다. ‘통진호적’은 1901년 통진군 보구곶면의 6개 리, 총 218戶·759명의 가족사항, 四祖, 연령, 직업 및 주택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 현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에 위치한 甫口串은 강화도 염하와 조강, 한강이 합류하는 교통의 요지로 예로부터 쟁기의 ‘보습’을 뜻하는 ‘甫十串(보십고지)’, ‘犁耳串’ 등으로 불리었는데, ‘보십고지’의 어원 자체가 “시장이 형성되기 좋은 위치로 사통팔달의 교차로가 있는 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01년 ‘통진호적’을 분석한 결과 이곳은 전체 호주의 50.9%가 비농민인 商民과 船民으로 이루어져 있어, 상업과 유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과반을 차지함을 알 수 있었다. 이들 상민과 선민은 조선후기 상품유통의 발달로 늘어난 船商, 船主人, 船卒들의 후예들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연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포구를 중심으로 나름대로 지역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계층이다. 그러나 가족 구성과 가옥 규모를 살펴볼 때 농민에 비해 결코 우월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선민은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9세기 말까지 상업적으로 가장 번성한 모습을 보이던 이곳은 인천과 마포를 잇는 정기 기선의 항행, 경인철도 개통 등 근대적 운수업의 발달로 점차 상업이 쇠퇴해지고 만다. 1900년대 의병전쟁과 잦은 水賊들의 침입도 이를 가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민적통계표에 상인 등 비농민은 22.2%이고, 농민이 77.8%를 차지하게 되는 변화가 이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읍지와 지도로 본 ‘보구곶’의 지리적 환경
3. 호적자료로 본 ‘보구곶’ 주민의 생활 양태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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